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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징조

그날 회상하기1

by sleepingwis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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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징조

큰일이 발생하기 전에 징조라는 것이 있다. 보통 동시성 현상을 경험하거나 예지몽을 꾸거나 특이점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의 성공 여부를 알기 위해 점술이 발달한 것도 그 징조를 알기 위해서다. 미리 예측 가능하다면 마음 편하게 준비할 수 있으니까. 특히 좋은 일은 그렇다 하더라도, 안 좋은 일은 미리 알고 피하길 바라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징조와 점술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점술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실제로 자연에서 나타나는 징조나 점술을 활용해 전투의 승패를 예측하곤 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하늘의 구름이나 별자리의 변화를 보며 전투 결과를 예측하려고 했다. 밤하늘에서 갑작스레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를 전투의 흉조로 해석하며 신중한 대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꿈에서도 커다란 붉은 깃발이 찢어지는 것을 보았고, 실제로 다음 날 방어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후 적이 기습 공격을 단행했으나 방비를 잘하여 피해를 막은 기록도 있다. 그는 이러한 징조들을 예리하게 해석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예감한 기록들이 어떤 징조나 꿈의 형태로 곳곳에 남아있다.



이러한 징조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현대에서도 많은 사람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동시성 현상을 경험한다. 예컨대, 어떤 이는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 연달아 비슷한 조언을 듣거나, 예상치 못한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오는 경험을 한다. 혹은 안 좋은 일이 닥치기 전, 이상한 예감을 느끼거나 평소와 다른 신호를 감지하기도 한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날, 몇몇 사람들은 징조나 예감을 통해 목숨을 구했다. 한 남자는 평소와 달리 그날 아침 지각을 했고, 덕분에 자신이 일하던 건물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는 이상하게도 일하러 가기 싫은 기분이 강하게 들어 늦장을 부렸다고 인터뷰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비행기가 건물에 충돌한 후였다.



또 다른 사람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갑작스레 불안감을 느끼고 탑승을 취소했다. 그녀는 심한 불안으로 두통과 구토까지 했다. 몇 시간 후, 그 비행기가 사고를 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떤 신호가 그녀의 몸에 전해져 비행기 탑승을 막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운명의 예고를 받았거나, 징조를 통해 살아남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경험한 예감이나 우연을 신비한 징조로 해석하며, 자신의 생명이 구해졌다고 믿는다. 이는 우리가 삶의 중요한 순간에 미처 알지 못하는 신호나 징후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최근 유튜브에서 본 영상도 떠오른다. 잠수함으로 북극해 여행이 예정된 아버지와 아들이 수상한 느낌을 갖고 여행을 취소한 경우다. 잠수함 설계자이자 사업가가 할인을 제안했고, 두 부자를 위해 일정도 변경해 주었다.


심지어 그 사업가가 아버지를 설득하러 라스베이거스까지 직접 와서 설명하며 정성을 들였다. 보통 그러한 정성이면 여행에 동행할 만하다. 하지만 그 두 부자는 결국 이상한 느낌과 불안함에 여행을 취소했다. 그런데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예약해서 여행 중에 잠수함 폭파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주변에 차고 넘친다. 모두 이상한 징조를 느끼고 혹은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생명을 건지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화를 입는 경우도 있다. 점술은 그 자체로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어려운 영역이지만, 징조나 예감을 통해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이런 점술과 징조 해석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전쟁 같은 생사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더욱 부각되었다.




징조란 결국, 단순히 운명을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가능성에 대비하는 인간의 지혜로운 방식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일의 성패를 알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점술에 의존하고 있다.



나에게는 그날의 사고가 일어난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날씨는 전형적인 낫짱의 3월 날씨였다. 그만큼 따뜻하고 해수욕하기 좋은 아침이었다. 기분 좋게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매일의 루틴처럼 모래사장에서 맨발로 조깅도 하고 해수욕도 할 생각이었다.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나의 컨디션이 어느 날보다 좋았다.



내가 우둔해서 그날 사고의 징조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냥 나는 여느 날처럼, 또한 여느 아침처럼 나의 루틴을 하기 위해 바닷가로 향했을 뿐이다. 일상이 평온해 보였고 내 마음에도 어떠한 불안함도 없었다.



꼭 그 징조라는 것은 나의 일이라고 나를 통해서 혹은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고 당일에 베트남 지인의 꿈을 아내를 통해서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기에 나에 대한 예지몽을 꿀 리가 없을 법한데, 그분과 관련된 일이 되어버렸다. 묘령의 여인이 그의 꿈에 나타나서 탁자를 갖고 가버린 것이 그에게는 사건의 징조였다. 그가 그 일로 생사를 오가는 나를 도울 운명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미리 신의 손에 기록된 운명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노력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정해진 것은 무엇이고 의지나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그에게 도움을 청하리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었을까?


그가 나의 꿈을 꿀 만큼 절대 친한 사이가 아니다.


그와의 인연은 현생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


그렇다면 전생의 깊은 인연인가? 전생이란 있는 것인가?


이 모든 운명의 설계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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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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