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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Oct 06. 2023

[D-87]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 없는 삶

279번째 글

뉴질랜드에서의 네 번째 아침. 그 아침을 여느 때와 같이 커피 한 잔으로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잔을 두 손으로 잡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넘기니 살 것만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기력이 돌아오지 않는 느낌이 든다. 예전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개운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는데, 이젠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무조건 커피를 들이켜야 한다.


심지어 이젠 그냥 커피도 아니고 얼음을 가득 넣은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하다. 원래 뜨거운 커피를 더 좋아해서 한여름에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곤 했었는데, 이젠 아침에 마시는 커피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더 선호하게 되었다. 카페인이 주는 자극에 차가운 온도가 주는 자극이 더해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이젠 그 정도의 자극이 아니면 피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뉴질랜드에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파는 카페를 찾아보기 힘들다. 공항 카페에서도 메뉴에 뜨거운 커피만 있었고, 지금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에 와 있는데도 웬만한 카페는 아이스 옵션이 아예 없다. 뉴질랜드 사람들은 뜨거운 블랙커피나 라떼를 받아 들고 자리를 뜬다. 아이스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건 오직 나뿐인 것 같다. 어쩌면 뉴질랜드 사람들은 그만큼의 자극이 필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이 날씨, 이 자연환경, 이 햇살을 받으며 한적하고 여유로운 곳에서 살아가는 뉴질랜드 사람들은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할 만큼 바쁘게 살아가지 않는 것일지도. 나 혼자만 허겁지겁 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여유로워지고 싶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미 컨디션이 최상이라, 가벼운 몸을 일으켜서 창문을 열고 바람을 느끼고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따라 마시기만 해도 이미 잠 기운은 모두 가시고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마무리되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일상을 상상하다가, 어쩌면 내가 여유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유로워지고 싶어서 너무 많이 노력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여유로워지는 방법을 몰라서 계속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다.


여유는 과연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걸까? 예전에 행복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글 보러가기). 그 글에서 나는 이미 행복한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썼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것이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그래서 거대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 아닌, 이미 소소한 일상 속의 기쁨으로 인해 행복으로 충만해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고. 여유도 행복과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미 여유로운 사람만이 진정한 여유를 찾을 수 있다. 여유로워지려고 너무 많이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게 된다. 내가 과연 여유롭게 살고 있는 건지 계속해서 반문하고 고민하게 된다. 여유로워야 한다고 나를 들들 볶게 되고, 나의 일상을 스스로 검열하게 되고,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여유로워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 일상 속에서 작은 쉼을 발견하는 것. 마음을 느긋하게 먹는 것. 인생에 여백을 두는 것. 그게 바로 여유로워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새벽마다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키며 아침을 시작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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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6일,

뉴질랜드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서 창 밖 풍경을 바라보.



*커버: Image by tabitha turner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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