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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Mar 20. 2017

Blue Valentine: 울적한 사랑의 맹세

라이언 고슬링, 미셸 윌리엄스

[미국영화/데릭시엔프랜스] Blue Valentine: 울적한 사랑의 맹세


 블루 발렌타인, 2010

 라이언 고슬링, 미쉘 윌리엄스



 . 데릭시엔프랜스


 이후에 나온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스와 같다. 그는 이야기를 함과 동시에 이야기 대신 차라리 인생의 부분들을 채집해 펼쳐 놓는 듯 하다. 명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그 너머는 다시 지금 여기. 반복적인 모든 삶으로부터 당신을 구할 수는 없다. 있는 그대로 당신의 인생일 뿐이라고, 여기엔 환상도 없이 감았던 눈을 뜨면 여전히 살아가야 할 세상이고, 사랑이다. 나에게 이것은 오히려 넘쳐나는 현대 긍정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진짜 세계다. 오히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 Blue Valentine, 울적한 사랑의 맹세


 우리는 발렌타인이 맺어주는 사랑의 맹세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은 언제나 소박하게 시작하지만 찬란한 빛으로 감싸이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블루는 이미 색감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어떤 우울감을 떠오르게 한다. 사랑이 다 우울할리 없지만 당신, 어쩌면 언제나 환상 속에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현실은 우리를 짓누를만큼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태어날 때와 여전히 같은 무게로, 현실을 외면할 때마다 쓰디쓴 공기는 점점 버거워진다.


 맹세에 초점을 맞춰보자면 우리는 맹세 자체에 울적해야 하는 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랑인데 맹세라는 틀 안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힌다. 그건 현실도 무엇도 아닌, 아닌 그 뭐지? 싶은 거다. 서약의 신성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길래 여기 이 찬란한 현실을 옥죄는 지. 영화의 마지막은 그렇다. 맹세 뒤 찬란한 빛으로 빨려 들어가던 둘은 하나만 남은 채로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맹세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맹세로써 당신이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지, 꼭 맹세로써 지켜야 했는 지 의문을 가질 차례다.


 인생은 울적하다. 울적한 단면을 거부하면 베일로 가려두었던 울적함이 곪은 채로 곧 전부를 울적하게 만들 뿐이다. 사랑도, 당신의 환상도 아무 소용 없게 된다.



 . 동화 속에 사는 남자


 영화 내내 우리는 딘의 선량함과 그윽한 사랑에 이끌린다. 거친 외면에도 불구하고 그는 순수하며, 여전히 순수하다. 딘은 동화 속에 산다. 사랑으로써 가능한 삶을 노래한다. 단순히 사랑 뿐만 아니라 내면으로써 세상을 구성한다. 딘과 신디는 동화 속에서 만난다. 하지만 둘의 사는 곳은 다르다. 딘은 원래부터 동화 속에 있었고 신디는 동화책을 펼쳐 본 인간이다. 동화 속에 사는 게 더 좋은 지, 현실에서 사는 게 더 좋은 건지 우열을 가릴 수는 없는데 확실한 건 두 곳에 다리를 다 걸치고 있는 편이 나으리라는 점이다. 적어도 둘은 그러지 않아서 자꾸만, 왜인지, 투명한 벽에 부딪히고 있었으므로. 딘은 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 아름답기'만' 했다.


 언뜻 피터팬이 생각난다. 남자는 노인의 죽음 앞에 자신은 그렇게 늙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늙어서 죽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 남자는 잔인한 피터팬이다. 자신이 늙지 않으니 다른 사람에게도 젊게 살 것을 요구한다. 어쩌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기꺼이 맡겠고 너와 가족이 되겠다는 것도, 그 어떤 식의, 이기적인 선택이였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절대 슬플 수 없다고 되뇌이며 기적의 땜질로써 현실을 외면한다. 동화적 삶을 실천하기 위한, 큰 그림 같이. 그러니까, 어쩌면 아이를 없애지 못한 여자가 오히려 동화 같은 결말을 더 간절히 원하고 있지 않았을까. 동화 속에만 쭈그리고 앉아서는 어떤 인생도 견인할 수 없다. 사랑도, 아이도. 돌아 보면 이 피터팬은 아이를 낳지 못했다. 아이와 친구이기만 했지, 아빠가 되긴 한걸까.



 . 동화 책을 덮은 여자


 아름다운 동화를 읽었다. 책을 덮는다. 그런데 동화 속에서 만난 남자가 통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않는다. 여자도 어쩜 책을 다시 펼쳐들 생각은 없어 보인다. 표지 너머의 남자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기 위해, 서로에게 소리를 지른다. 남자는 책을 박차고 나올 생각이 없고, 여자는 책을 펼쳐볼 여력도 없다. 현실의 무게란 환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온다. 둘이 좌우간 공존할 생각이 없을 때 생겨난다. 남자만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게 아니다. 남자는 도무지 자신의 환상에 사로잡혀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넘치게 사랑한다. 그때 참 잔인하고도 비교적 소박해 보이는 그녀의 이해받지 못한 사랑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어 비난 받을 지경에 이른다.


 동화의 긍정성도 현실의 무게도 변명이 된다. 하지만 인생은 못 되나 보다. 여자는 언제는 동화 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된다고, 아니면 남자를 현실로 불러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현실로 나오지 않은 남자를 탓하지만, 사실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딘은 결혼 반지를 손가락에서 뽑아 던져버린다. 그러곤 바로 반지를 찾으려 풀밭을 휘적인다. 신디는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다가 이내 풀밭(다시 동화 속으로)으로 들어간다. 딘 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쯤 알고 있다. 하지만 되돌아 갈 수 없는 땅도 분명 있는 법이다. 마음 먹는다고 돌아갈 수 있다면, 아니 마음 먹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애초에 앞으로 나아갈 필요도 없지. 그럼, 그럼. 신디는 돌아갈 수가 없다. 나아가는 것 말고 어떤 옵션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게 동화 책을 덮은 어른의 최후다.  



 . 이야기는 늘 극단적이다


 두 사람의 괴로운 현재는 언제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면에 가득찬다. 화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진다. 그만큼 가깝고 버거운 현실, 그리고 과거(동화 속)에 있는 그들은 우리와 적정한 거리를 둔 채 아름답게 그려진다. 물론 영화 내내 표현력은 초-검소하다. 화려하지도 무작정 우울하지도 않은, 마치 배경음악도 조명도 따로 없는 실제 인생장면 같다. 영화는 늘 극단적이다. 아무리 잔잔한 문법에 영상과 스토리를 기대고 있어도, 어떤 스펙타클한 요소를 곁들였을 때도, 영화 속엔 늘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는, 나는 아니지만 충분히 내가 될 수 있는 극단적 인물과 극단적 상황이 자연스러운 척 녹아있다. 뻔뻔하긴.


 바람직한 건 잘 모른다. 이러쿵 저러쿵 떠들어 대다보면 내일은 이렇게 살아야지, 이런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대해야지, 인생이 이랬으면 좋겠다 싶다. 단지 기대는 조금 덜하며, 적당히 유치하게, 살고 싶어 진다. 소극적이지 않은 균형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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