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호주 3대 와이너리 달리기
포도밭 달릴까?
"이번 주 일요일에 포도밭 달리기 할래요?"
바로 돌아오는 대답은,
"오, 좋아요!"
마라톤 페스티벌에는 5Km, 10Km, 하프 마라톤, 마라톤이 있었지만
달씨와 달벗은 10Km 달리기 대회 참가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신청과 결제 완료.
막판 즉흥 신청의 달인, 달씨.
지역은 애들레이드에서 1시간 남짓 북쪽에 있는 거대한 와이너리 지역 바로사 밸리이다.
바로사 밸리
남호주의 와이너리 3 지역-바로사 밸리 (Barossa Valley), 클레어 밸리 (Clare Valley), 맥클라렌 밸리 (McLaren Valley)-중 가장 먼저 생기고 가장 오래되었다. 유명한 와인 생산자들이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 여유롭고 목가적인 지역이다.
달씨는 그 지역을 좋아했지만, 마지막으로 간 것은 아마도 10년은 된 듯했다. 이상하게 갈 일이 생기지 않는 참이라 달리기 핑계 삼아라도 가보픈 곳이었다.
특히 봄이 오는 길목 8월은 애들레이드에서 가는 길이 노란 유채꽃밭이 되어 제주도도 생각나고,
아몬드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광경을 지나면 고흐 그림이 살아 있는 듯 예쁘다.
포도 3송이 메달
그리고 또 하나 달씨가 바로사 밸리에서 달리고픈 이유는 바로 포도 '메달'시리즈의 마지막 조각 때문이었다. 트리플 바인 시리즈 (Triple Vine Series)라고 한다. 3곳의 빈야드 (vineyard)에서 달리기를 하면 모양은 같으나 색깔이 다른 포도 메달을 준다. 맥클라렌은 쉬라즈를 대표하는 레드, 클레어는 리슬링을 대표하는 그린, 그리고 바로사는 포도의 상징인 보라색 메달이다. 같은 해에 3곳을 다 참가하면 3 포도송이를 걸 수 있는 포도나무 가지를 주어, 한 곳에 걸어 장식할 수 있게 된다.
달씨는 같은 해는 아니지만 23년에 맥클라렌, 24년에 클레어를 달려보았다. 그래서 올해 25년은 바로사를 두 발로 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셔츠 탐나서 파크런을 하고, 메달 때문에 포도밭을 달리는 달씨) 3 송이 메달을 꿈꾸며.
누구나 사연을 품고
1시간이 넘는 곳이라 둘은 한 차로 가기로 했다. 그 새벽 달씨와 달벗은 퀭한 눈으로 만났다. 카페인 없이 갈 수 있을까 싶은 타이밍에 마침 달벗이 커피를 들고 나왔다.
달씨는 전날 심상치 않은 햄스트링 문제로 물리치료사를 만났다. 달리기를 위해 물리치료를 받으면서까지 대회에 나가는 이유를 물리치료사도 자신도 납득을 해야 했는데 멋진 답변을 못 찾았다. 한편, 달벗도 저녁에 아이가 아파 갑자기 응급실에 가서 새벽에 귀가한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새벽에 눈을 비비며 차를 몰고 있는 것은 왜일까.
아무 사연 없이 출발선에 선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누구나 다 말 못 할 부상, 통증 사정, 집안 사정, 업무 일정 등등 각자의 사연을 품고 달리는 것이겠지.
"우리 잘할 수 있을까?"
"오늘은 둘 다 완주에 의미를 두는 걸로."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아직 찬 공기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꽃들이 봄 채비를 하는 듯했다. 고속도로를 넘어 대회 지역으로 갈수록 언덕 가득 포도밭들이며 초록 잔디에 가득한 양들이며 그저 평화롭기만 한 아침 풍경이다. 그림 같은 나무 아래 피크닉 매트 깔고 도시락 먹으면 딱 좋을 곳이었다.
대회장 근처에 도착하니 조용한 시골도 이미 주차 전쟁. 간신히 멀찌감치 한자리 찾아 세우고 출발지에 섰다. 타눈다 (Tanunda)라는 곳에서 시작이다.
흥분감에 얘기 나누는 사람들, 워치 맞추는 동작들 그리고 출발 신호 '탕'.
마음대로 안되는 것도 닮은 달리기
대회 전 구글에서 미리 본 코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포도밭을 지나는 것이다. 마을도, 이렇다 할만한 건물도 없는 들판. 포도밭 사이의 도로가 생각보다 넓어서 주자들은 바로 각자 페이스대로 흩어질 수 있었다.
달씨는 왼쪽 햄스트링 살피며 조심조심 가려는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오른쪽 다리? "쥐, 니가 왜 여기서 나와?"
주로에서 빠져나와 다리를 풀어주고 발목도 살피며 천천히 갔다. 후로도 종아리 근육 경련이 몇 번 일어났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는 것도 인생과 닮은 달리기.
천천히 가자.
출렁이는 러너의 페이스와 상관없이 하늘은 쾌청하고 겨울잠에서 깬 포도밭의 갓 올라오는 작은 새순들은 싱그럽기 그지없었다.
한 시간 전에 출발한 마라토너들의 힘겨운 숨소리들이 둘을 스쳐 지나쳤다.
오고 가고, 빠르고 느리고, 정신없는 움직임 속의 질서.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자연은 제 시간대로 움직이며, 각자의 결승선을 향해 달린다.
달리기 대회가 꼭 인생의 샘플 한조각 같다.
구글 맵에서 본 그대로, 코스는 하나의 반전 없이 양쪽 포도밭만 있었다. 흙길을 지나는 구간 없이 평탄한 아스팔트 도로이다. 물론 나름 응원밴드도 있었다. 다만, 너무도 고요한 백파이프 연주라 마음의 평안이라기보다 늘어짐을 준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젖소 코스튬을 입고 응원해 주는 지역 주민도 있었지만 대체로 매우 고요한 코스이다.
평지 코스라 기록 경신을 위해서는 좋을 수도 있겠다. 지루함만 잘 견뎌낼 수 있다면.
동반 완주
10Km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거리이다. 사연이야 어땠든, 곡절이야 어찌 됐든 끝나고 나면 기분 좋은 달리기 대회이다. 주로에서 꺾어져 있는 곳에 숨어있는 결승선이기에 아무리 달려도 보이지 않던 곳이 드디어 눈에 들어왔다. 우연치 않게 같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색으로 입은 두 러너는 유난히 힘들게 느껴졌던 그날의 몸들로 헉헉거리며 결승선을 함께 통과했다. 전날의 응급실과 물리치료실들은 또 다 지나간 채.
아하 그런데!
메달이, 메달 디자인이 바뀐 것이 아닌가!
와인잔으로.
달씨의 포도 3송이 컬렉션은 날아갔지만,
보라색 와인잔을 움켜쥐고 고민했다.
"와인잔 컬렉션 해 말아.."
와인 잔에 아드레날린 듬뿍 담아 마시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8월의 호주 달리기
8월 말의 호주는 달리기 하기는 가장 좋은 때인 것은 확실하다. 여행하기도 좋은 시즌이다. 봄 햇살처럼 낮엔 따사로워 가벼운 옷차림이 반팔까지 가능하고, 온통 초록에, 낮기온은 낮아 벌레도 없다. 시드니마라톤도 이 시기의 매력을 알아챘을까. 메이저에 선정되어 25년부터 8월 마지막 주로 변경된 시드니마라톤은 달리기와 여행하기에 좋을 수 있고 달씨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