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대환을 추모하며 4
셋째형이 돌아가신 1986년, 31살의 대환은 직장생활 10년 차에 접어들었고, 돈을 빌리는 사람이 없어지니 월급이 부쩍 늘은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첫아들, 6살 딸, 4살 아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전셋집을 들어가 월세로 나가는 돈이 없으니 돈이 남아돌아간다는 느낌마저 들었단다.
때는 대한민국에 경제성장이 고도화되어 가던 때였던지라 83년 '종합주가지수' 제도가 도입되면서 '코스피 지수'란 개념이 생기고
100으로 시작한 코스피 지수는 87년에 500을 돌파했다.
그때 대환은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는데 89년에 1000포인트를 넘었다니,
그때 주식시장에 뛰어든 사람들 대부분이 2년 만에 주식이 적어도 2배로 뛴 셈이다.
대환은 운이 좋아 10배로 뛴 주식도 가지고 있었다.
주식을 시작한 지 2년 후 셋째 형에게 빌려주느라 받았던 대출을 다 갚고,
2층짜리 집을 두 채 사서 하나는 가족이 살고, 하나는 월세를 놓을 정도로 살림이 폈다.
그리고 주식 시장은 계속 불타올랐고, 대환은 돈이 생기면 땅을 샀고, 주식을 샀다.
대환의 아내는 저축을 해야지 않겠냐 했지만, 대환은 저축은 바보들이나 하는 거라며, 투자를 늘리고, '빚투'까지 감행했다.
10년 간 대환의 인생에서 가장 호시절이었다.
젊고, 돈은 불어났고, 승진도 탄탄대로였고 아이들은 공부를 잘했다.
왕도 부럽지 않게 잘 먹고, 잘 입고, 어디서든 큰소릴 치며 다녔다.
대환의 주변엔 사람이 모여들었고, 호방한 그는 기꺼이 술을 샀다.
그 호시절엔 대출로 땅 사고, 주식을 사서 혹시 값이 내려가 손해를 봤다 하더라도 또 대출이 되었고, 그 돈으로 더 벌면 그만이었지만
대한민국이 망한 1997년이 왔다.
IMF 관리 체제 하에 들어간 1997년 11월 이전에 이미 1월부터 주식 시장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조짐은 많이 보였다. 대기업들이 도산하고, 태국, 대만 등 아시아의 경제 위기는 거의 매일 뉴스 단골 소재였다.
대환의 아내는 주식을 빼서 대출금을 갚으라고 매일 잔소리를 했지만
대환은 위기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실 하도 많은 회사가 매일같이 도산하여 휴지조각이 된 주식들 때문에 손해가 났기에, 원금 회수만 하고 빠지자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10월 코스피는 다시 500으로 주저앉았고, 휴지조각이 된 주식은 더 많아질 뿐이었다.
이젠 팔래야 팔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또 은행에선 빚 독촉을 하다 대출금 보증으로 잡혔던 땅들을 하나 둘 경매로 넘겼다.
대환은 아이들과 아내가 살던 집만은 지키려 했지만, 대출 이자가 30프로에 육박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너무나 무리하게 빚투를 한 상태였다.
1998년 1월 대환의 가족은 말 그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을 때
대환의 아내가 아이들의 작아진 옷, 신발 등을 이웃에게 팔고, 티브이며 장롱도 고물상을 불러 판 돈으로
겨우 산 꼭대기에 있는 판잣집에 월세를 얻을 수 있었다.
큰 아들이 동네 통장에게 빌려온 리어카에 그릇이며 냄비 등 세간을 싣고 앞에서 끌고, 대환의 아내는 뒤에서 밀고, 중3이 된 막내아들은 엄마가 싸준 옷 보따리를 손에 들고 '달동네'를 오를 때
대환은 이 현실을 믿을 수 없어 술만 진탕 마셨다.
직장도 잘 나가질 않았다.
직장동료들도 사정을 알아서 병가에 연가, 휴가를 붙여주며 대환에게 출근만이라도 하라고 애원하듯 했지만
큰돈을 만지던 대환은 겨우 몇십만 원 월급이 우스워보여 출근조차 괴로웠다.
얼마간 출근을 하다가도 또 술을 마시느라 며칠씩 무단결근을 하는 날이 이어졌고
징계를 받고 직위해제를 받고 면직당하면 공무원 연금이 깎이니 스스로 사표 쓰라는 상사의 말에 대환은 쉽게 사표를 내버렸다.
20년 근속을 했기에 평생 동안 연금을 받을 수 있었으니
그때 일시불로 퇴직금을 받지 않고, 다만 얼마라도 연금으로 돌려놓았으면 좋았으련만
대환은 자신의 투자실력을 믿었다.
일시불로 받은 퇴직금으로 마지막 재기를 노렸으나 잘 안됐다.
그리고 대환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의 나이 44세.
다 그 사람 술 많이 마시고 죽는다고 하며
그 많던 술친구들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그의 병실에 병문안조차 오질 않았다.
대환은 악으로 일어섰다.
입원 치료가 끝나고, 20살이 된 큰 아들이 아버지를 업어서 통원시킬 때
대환은 왼쪽 몸에 마비가 와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침을 흘리면서도
공인중개사 시험 책을 봤다.
그리고 다리를 절뚝이면서 시험장에 들어가 한 번에 합격했고
3급 장애인증을 받은 상태에서 개업을 했다.
하지만 병원비와 복덕방 개업 모두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그의 큰아들은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할 때
대환은 그를 말린다.
일찍 사회생활을 한 대환은 남자가 사회생활이 1년, 2년이라도 늦어 자기보다 나이 적은 상사에게 잔소리 듣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무수히 봐왔기에
휴학하지 말고 일찍 졸업할 생각을 하라고, 아버지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딸, 막내아들도 학업을 놓지 않도록 대환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주식도 다시 시작했다.
30대 때 손대는 것마다 돈이 붙던 시절은 40대, 50대 때 다시 오지 않았다.
큰 아들이 취업을 하고, 작은 아들도 대체복무로 대학교 교직원이 되어 자기 밥벌이들을 시작할 때
49살의 대환은 파산신청을 하게 된다.
그나마 공인중개업 하면서 사놨던 평당 3만 원짜리 정도의 쪼그만 땅 조각들이며 20년 넘은 아파트를 아내와 아들, 딸의 명의로 돌린 상태라 대환 명의의 재산은 없어 은행에서 가져갈 건 차 밖에 없었다.
파산신청을 한다 해서 모든 빚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50대 때 또 끊임없이 빚을 갚는 세월이 지속된다.
공인중개업 하는 이들도 많이 늘어 가게 매출도 예전만 하지 못했고
나라에서도 공인중개업자들을 무슨 '부동산 투기 세력에 기생하는 돈벌레'처럼 취급하며 각종 규제로 묶기 일쑤였다.
뇌졸중 때문에 다리가 불편해지고 치아가 다 틀어져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도 힘든 대환은
이런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심장이 따끔따끔해왔다.
그러다 어느 날 난데없이 말벌에 쏘여 병원에 갔더니
벌쏘인 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사람 죽게 생겼다며 대학병원 심장외과로 실려 보내진다.
그날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장 혈관이 막혀있다는 얘길 들었고
스텐스 시술을 하게 된다.
그리고 1년에 두 번씩 검사를 받으며 10년에 걸쳐 스텐스를 5개나 끼게 된다.
그 와중에도 이제 장성한 아들들과 딸이 각자 밥벌이를 하고 다들 32,33살 즈음에 결혼도 차례차례 하는 등 경사도 많았다.
2021년 5월 15일, 대환은 바로 위 누님과 통화하며
"숨쉬기가 요즘 힘들어. 누나 나 얼마 못 살 것 같아. 잘 있어."란 말을 하시더니
16일 병원에 갔고, 17일 심장 개복수술 후 코마 상태에 빠졌고, 24일 영면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