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염증수치가 오르지 않았네요. 잘 유지되고 있으니 스테로이드를 좀 줄여볼까요?”
“정말요? 네, 줄이고 싶어요! 지난번처럼 아프면 다시 먹으면 되겠죠?”
검사 결과는 좋았다. 염증수치가 안정권이니 스테로이드를 줄이자는 선생님의 말에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3번이나 약을 줄이는 시도를 했지만 매번 실패했다. 오랜만에 듣는 선생님의 말은 마치 완치됐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줄이는 약은 저녁에 먹는 반 알의 스테로이드다. 작디작은 이 반 알의 약은 염증반응을 억제하고 통증을 줄이는데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한 번이라도 먹지 않으면 관절 통증을 바로 느낄 정도다.
난 아침저녁으로 총 10알의 약을 복용한다. 류머티즘 관절염 환자의 복용 용량치곤 적은 양이 아니다. 염증이 가라앉고 일정기간 변동이 없으면 차츰 약을 줄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저녁에 먹는 작은 반 알의 스테로이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5년여 전, 염증수치가 떨어지고 몇 개월 유지가 되어 스테로이드를 줄었다. '반 알 안 먹는다고 뭐 얼마나 아프겠어!'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다. 작디작은 약의 위력은 엄청났다. 약을 뺀 지 하루 만에 통증을 느꼈다. 류머티즘 관절염의 통증은 일반 관절통과는 다르다. 관절부위에서 느껴지는 압통은 물론이고 몸 전체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통증이 느껴진다. 그리고 모든 관절이 뻣뻣해진다. 여기에 심리적 불안도 동반되어 아주 나쁜(?) 기분이 생성된다. 신체적 통증도 통증이지만 심리적 우울감은 더 심하다. 약을 빼고 3일째부터 통증은 심해졌고,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은 통증 앞에 무너졌다. 통증의 두려움을 3번 겪은 후, 의사 선생님도 나도 약을 빼는 것에 무척 조심스러워졌다.
독한 약의 장기간 복용은 또 다른 부작용이라는 줄기를 만든다. 그래서 염증수치가 안정권에 들어가면 약을 줄여야 한다. 몇 년 동안 검사 결과가 좋았고 최근에는 몸 상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일까, 약을 줄이고 힘들었던 기억은 까맣게 잊었다.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던 선생님의 걱정을 한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콜레스테롤 수치가 너무 높네요. 이 정도면 일반인들은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환자분은 약 늘리는 게 무척 부담스러워요. 다음 검사에서 변동이 없으면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고작 반 알을 빼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는데, 다시 다른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이런 지옥이 있나. 반 알을 줄이는데 5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 한 알을 늘린다니. 긴 시간을 질병과 함께 했지만 병은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이라면 콜레스테롤을 낮추기 위해 운동과 식단을 계획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실천할 테지. 그러나 난 뭐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다.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는 류머티즘 관절염의 합병증의 하나고, 일반인처럼 운동이나 음식 조절로는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운동도 식단도 포기할 수는 없다. 진료실을 나와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답은 없었다. 무슨 운동이든 관절에 무리를 주면 안 되니 할 수 있는 운동이 몇 가지 없다. 수영, 산책, 그리고 실내자전거 정도다. 저체중에 위장도 약하니 식단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익숙할 법도 한 상황들은 항상 처음 겪는 듯 생소한 감정을 만든다. 마치 문득 올려다본 파란 하늘로 기분이 한껏 좋았는데, 미세먼지가 가득하다는 일기예보를 듣는 기분이랄까.
햇병아리 초보운전 시절, 터널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싫었다. 어두운 터널에 들어가면 긴장이 됐다. 더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만나면 더욱 두려웠다. 어느 날, 고속도로를 달리다 기나긴 터널에 들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터널 안 전등마저 군데군데 빛을 잃고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처럼 두려웠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어느새 손엔 흥건하게 땀이 맺혔다.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터널 밖은 분명히 밝을 거라는 확신에 가속페달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터널 끝에서 마주한 바깥은 안개인지 먼지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시아를 가려 운전이 힘들었다. 기대는 한순간에 사라졌고 불투명한 세상에 또 다른 두려움이 밀려왔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천명관 [고래]
우린 일상을 이어가다가도 힘든 일과 마주한다. 그것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삶을 살아가면 느낀 행복과 사람들과 나눈 사랑의 기억 때문 일거다. 삶에 대한 희망은 이 작지만 강렬한 행복과 사랑의 느낌으로 만들어간다.
약을 줄였지만 합병증이 생겨 또 다른 약을 먹어야 한다. 예기치 못한 다른 병으로 힘든 시기가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나 역시 건강했던 기억, 일상을 이어가며 느끼는 행복, 지금의 편안함, 이것들이 아픔과 걱정, 불안을 이겨내고 희망을 갖게 한다. 어둡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터널을 만나도, 터널을 나와 앞을 가로막는 안개를 만나도 용기와 희망을 갖고 헤쳐나가게 한다.
닦아도 닦아도 어느새 쌓이는 먼지처럼 살아가는 내내 힘든 일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난 부지런히 닦아낼 것이다. 그것이 내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책임과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지금의 난관도 닦아낸 먼지처럼 사라질 것이다. 오늘도 난 부지런히 내 삶에 쌓인 먼지를 닦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