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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랫화이트 Mar 21. 2024

너도 늙어봐!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것


“너도 나중에 늙어봐라. 그때 알게 될 거야. “


결혼 전, 엄마와 가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쇼핑을 하러 갔다. 지하철을 타면 엄마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리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문이 열리면 번개보다 빠르게 객차로 들어가 앉았고 내 자리까지 맡았다. 난 그런 엄마의 행동이 부끄러웠고,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그러면 엄마는 대뜸


 “너도 늙어봐, 나랑 똑같을 걸. 나이 들고 힘들면 어쩔 수 없어.”


엄마의 이 말은 당시 젊고 아프지도 않았던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질서를 지키지 않는 엄마가 부끄러웠고, 노인들에 대한 편견만 늘었었다.




스테로이드 반 알을 줄이고 일주일가량 통증과 무기력감으로 힘들었다. 이번에는 성공해 보자고 다짐했지만 결국 실패. 언제 닥칠지 모를 부작용이 두려워 줄이려고 했는데, 참을 수 없는 통증에 무너졌다. 다시 진료예약을 하고 병원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잔뜩 부어오른 손가락과 무기력함에 힘들다는 말에 허탈해했다.


“환자분은 그냥 약을 드셔야겠어요. 생활이 안 될 정도로 힘들면 안 되죠.”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씀과 함께 잘 버텨보자고 했다. 진료실을 나오며 일주일이라도 버텼으니, 노력은 해봤으니 된 거라고, 통증만 없으면 됐다고 스스로 위안했다.




병원 가는 날은 운전도 못할 정도의 몸 상태였다. 진통제를 한 알 먹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서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 있는 사람이 적은 라인에 서서 오지도 않는 지하철 터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혹시 사람이 많아서 자리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오직 앉을자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른 때 같으면 빈자리 욕심이 없지만 몸이 아프니 어떻게 해서든 앉아야 했다. 드디어 열차가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저 멀리 어두운 터널에서 희미하지만 광명과도 같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열차를 간절하게 바라봤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자리에 시선이 머물렀다. 안도감이 들었다. 난 문이 열리자마자 아픈 것도 잊고 거의 뛰어가듯 객차 안으로 돌진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심호흡을 크게 했고 지친 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객차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누가 있는지 어떤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난 마치 예전의 자리를 잡기 위해 뛰어 들어가던 친정엄마 같았다. 자리에 앉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중년의 아픈 사람이 되어 있었다.




보통의 날, 일상이 그런대로 유지될 때의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앉을자리가 나면 노약자가 있는지 주의를 살핀다.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것이 스스로 품위 있는 사람이 되는 길이라고 생각했고 그 실천의 하나라고 여기며 산다. 그러나 아픈 몸을 가진 나는 타인을 배려하는 품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품위 있는 사람들은 허둥지둥 대거나 버럭 소리치거나 이익을 얻기 위해 충동적으로 떼를 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반면 '실격당한' 사람들은 정반대로 행동한다고 어겨진다. 이들은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질서를 지키지 않고, 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행위 규범을 잘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지키는 데 서툴다.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엄마에게 잔소리하던 그 시절의 나는 지금의 나를 상상하지 못했다. 언젠가 나도 노인이 될 것이다. 난치병과 싸우는 나는 더 아픈 노인이 될 것이고, 어쩌면 '실격당한'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디서든 '실격당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엄마를 그리고 나를, 모든 이들을 위해 공감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엄마의 '너도 늙어봐'라는 말이 맴돈다. 그리고 품위를 지키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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