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말자
내게 하고 싶은 얘기를 타인에게 하면서 나를 다질 때가 있다.
포기하지 마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끝까지 해라.
아니, 하고 싶은 일의 열매를 맺고 싶다면 계속하라.
그저 맛만 보고 싶으면, 맛을 조금만 보고 끝내도 된다면 하다가 말고, 또 하다가 말아도 된다. 전혀 다른 데로 눈을 돌려 도망가도 된다. 더한 수렁이 있을 테지만. 허덕이다 보면 그게 수렁 인지도 모를 테지.
제자리보다 더 밀려날 테지만 우리는 그만 포기해 버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지인과의 대화 중에 누군가 말했다. 모르고 있을 때가 편했다고.
과연 그랬을까. 아는 게 더 낫지 않나. 모르는 게 나았다면 미완성 작품을 버젓이 내놓지 않았을까.
자료 조사 후에 적었던 설명문 종류의 글은 참 잘 적혔다. 창작이 아니어서일까. 창작, 문예창작을 어휴, 지금에 와서 문예창작을 심도있게 배우고 싶다니. 제대로 쓰고 싶은 열망이여. 어찌하리.
그저 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한 말을 실천한 지 1년 5개월이 지났다. 많이 읽었다. 푸흐, 그런데 내 손이 가는 책들은 번역서다. 시대도 아주 먼 과거, 심지어 1500년대 책도 읽었고, 1800년대 책들도 읽었다. 내 전생은 한국인이 아니었던 걸까. 이런, 전생을 운운하다니. 난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닌 걸까. 왜 이리 고전이 편하고 친숙할까. 고전을 읽으면 정말 편안하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가 참 많이 당긴다.
고맙게도 어제 만났던 지인이 알려 줬다. 나는 그 지인에게 늘 솔직하게 말한다. 그 분은 조용히 내 얘기를 먼저 들어주고나서 자기 생각을 말해서일까. 저절로 솔직해진다. 나는 말했다. 내가 최종적으로 써 보고 싶은 장르는 소설이고, 그 이후에 슬며시 읽히는, 문학처럼 읽히는 그런 수학책을 쓰고 싶다고.
갑자기 닭과 칠면조 얘기를 하셨다. 이해를 더하기 위한, 일명 사례다. 닭과 칠면조 이야기 속에 기승전결이 다 녹아 있었고 생활 속 사소한 관찰이나 경험으로도 글을 쓸 수 있는 거라고 알려 주셨다.
그런데 내게는 그런 것들이 사소하지 않다. 이제 시작이기에. 더구나 일상생활을 관찰하지 않으며 살았다. 또 한번 더 솔직히 말했다.
“전 소설도 외국소설만 읽었네요. 한국소설을 읽지 않았어요.”
일상 속 관찰이 모여 단편소설이 되고 단편 소설을 엮어 장편 소설이 된다는 말에 나는 숨을 돌렸다. 답답하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그런 후 곧장 한국 소설가 몇 명을 권해 주시며 이제 한국 소설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놀랐다. 그분이 말씀하신 작가들 중에서 난 신경숙이란 이름만 알고 나머지는 모두 모르는 작가였다.
그래, 이제 읽어 보자. 끌리는 것부터.
권해 주신 작품들 중에서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을 읽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음만 먹었다.
숙제처럼 하지 않으리라. 글은 숙제처럼 하지 않으리라, 그리 마음 먹었기에.
우리는 지혜의 숲 건물 옥상 벤치에서 얘기하다가 문발살롱으로 들어가 얘기를 더 나누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글을 잘 쓰시는 분이 학생 시절에 수학을 포기했던 얘기를 하셨다.
나는 말했다. 수학은 한번에 되지 않는다고. 파고 들어야 한다고. 그것도 오랜 시간을 깊이 있게. 그래서 하다가 이해 안되면 쉬기도 하고, 하다가 또 이해 안 되면 맛있는 걸 먹으며 두뇌를 달래기도 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다가 또 안 되면 책을 읽으며 상상 속 거리를 거닐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당연히 막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그럴 땐 산책을 하며 기분 좋은 바람을 쐬기도 하고, 그래도 또 수학에 헤매일 때는 노래 부르며 발산하다가, 쉬었다가, 하다가를 계속 반복해야지 수학을 조금 알 수 있게 되는 거라고.
그러면서 내가 깨달았다. 글을 수학처럼 오랜 시간 꾸준히 천천히 조금씩 하자고. 힘들어도 다시 또 쓰고 막막해도 계속 쓰자고. 내 식으로 말이다.
하늘을 보며 나무 아래 앉아 시를 읊으며, 후훗 흥얼거리며 그렇게 계속 하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