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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ileall Sep 17. 2020

오랜만의 독백

낙서장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다.

 “친구를 사람을…” 이후로 3개월 반이 흘렀구나.


 네 명의 내심은 그대 로거나 세월을 공으로 지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스스로 자문하는 시간을 가지며 세 명을 포함하여 피트니스 언니들을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상적인 동정심과 상상력을 갖춘 공평한 관망자는 다른 사람들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인 것처럼 경험하고 동일화할 수 있는 완전한 합리적 개인이다. _롤스


 무지의 베일을 쓰고서 합리적 개인으로써 관찰해 보려 노력했다. 요즘 롤스에 빠져 있다. 누가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공정한 무언가를 위해서. 소크라테스에서 롤스로...요즘  생각의 주춧돌은 롤스인 듯하다. 아닌가, 소크라테스와도 함께인가. 같은 주장일 텐데...


 7월에 정리했던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토막글로 나누어 발행하기로 하고선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롤스에 빠져서만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7월에 모두 발행하지 않았을까. 이유가 많다.

이유 1, ‘소크라테스가  말이지만 플라톤이 적었잖아. 그러니 플라톤을  알아야겠어.’

이유 2, ‘소크라테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은 , 내용을 정리했잖아.’

이유 3, ‘소크라테스가 말한 주장(변론)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있어.  진리를 갈구하는 이들은 모두 충격받을  있어.’ 이유 4, ‘내가 쉽게 이해할  있도록 내식으로 정리했잖아. 그러니 주관적인 시각을 객관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겠지.’ 등등.

...,

 실은 마음이 편해질 때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씩  수정하며. 아마도 내가 정리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아무렇지 않게 담담하게 읽을  있을 때까지 계속 수정하려나 보다. 그러다 언젠가는 토막글을 발행하겠지. 물론 발행한 후에도 수정을 거듭할 테지, 순수하게 다시 접근하여 플라톤이   원형을 유지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발행 버튼 앞에다시 주저하는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주장(변론) 애매하기도 하고, 모두에게 불편할  있는 진실을 직설적 대화법으로 단정 짓는  같기도 해서다. 나에소크라테스의 화법본인이 이미 마음먹고 결정 내린 후에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안내장 같다. 깨닫게 하는  아니라 정해진 길로 가는 핵심을 알려주는 듯하다.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주장을 둘러서 말하는 느낌이다. 소크라테스  자체가 결론으로 강하게 다가와서일까. 과정을 알고 싶은데 벌써 도착해 버린 기분이다.


 평생 자연과학만 가까이하여서일까.

다른 분야는 독서만으로는 무용지물인가...


 어쨌든 지금은 롤스의 글과 주장이 편안하다.

현재는 겸손한 롤스가 쓴 문장들이 좋다.


 내심 얘기를 하려다가 머릿속에 맴도는 소크라테스와 롤스 생각을 또 했구나.


 그동안 인간관계를 미루어 보면, 만약 싫은 사람이 있었다면 만남을 시작하지 않았을 거다. 아예 시작하지 않았겠지. 뒤에서 몰래 모의하여 누구는 빼고 누구는 더하는 그런 치사한 성격이 아니다. 더구나 몰래 무리 중 어느 누구에게만 연락하는 수상한 성격도 아니다.


 B 내가 C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단지 C 장점을 말했을 뿐인데. 누구든 사람을 처음 보면 장점부터 보이기도 지만 B 자꾸만 C 공격하며 몰기에 그저 C 장점을 부각해말했을 뿐이다. 우연히 유사한 경우가 연속적으로 일어나기도 했었다. 만약 의도가 있었다면 B C 장점을 보길 바라여 서다.


“넌 C만 좋아하지?”


B의 돌발 질문에 대답한 적이 있다.


“아니, 모두 좋은데.”

각자 나름 좋은 이유가 있다.

그래도 B는 모임 내내, 내가 C만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똑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었다.


‘짧은 만남에서 누군가를 쉬이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도 않지만 C만 좋았으면 C와 단둘이서만 만났지, 왜 다 같이 만났겠어.’


 우연히 C와 일치하는 주장이 있었을 뿐이다. C를 더 좋아하지도 B를 더 싫어하지도 않았는데 B는 그렇게 여겼다. B는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 같다. 사랑을 못 해 봤을까. 안 했을까...


 ‘좀 더 설명할 필요가 있겠지.’


 사랑하는 연인은 둘만 있고 싶어 한다. 둘이서만 만난다. 사랑하는 상대만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 그 사람만 존재한다. 사랑하면 오직 그 상대만 보이는 게 기정사실이다. 자기 눈에만 예뻐 보이는 사람이(남자 시각), 자기 눈에만 귀여워 보이는 사람이(여자 시각) 최고로 멋진 사람이지 않은가. 실상 타인이 보았을 땐 예쁘지 않고 귀엽지도 않은 외모이고 행동인데 말이다.  


 연인처럼은 아니어도 연인과 똑같지는 않아도, 인간관계도 비슷하게 통한다.(적용된다.)

B는 당연한 걸 왜 그리 신경 썼을까. 난 사람을 가식적으로 억지로 만나지 않는다. 난 연기도 잘 못한다. 더군다나 그런 척은 더 못한다. 게다가 비위 맞추는 데는 더욱더 소질이 없다.


 한번 사는 인생에서 주인공으로 살고 싶고, 나로 살고 싶다.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아름답고 진실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


 세 명은 나와 다른 두 명에게 어떠했는지, 각자 자신들만 안다. 가만히 있으면 영원히 모를 것이고, 자신에게 솔직하면 알 수 있다.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관망적인 입장에서 되돌아본 3개월 반을 정리한다.


 사적 모임을 마감한 후 네 명은 피트니스에서 함께 운동했다. 요가와 필라테스만 가능할 때는 C만 볼 수 있었고 댄스와 바디 스컬트 등까지 가능할 때는 모두 볼 수 있었다.

 A는 피트니스에서나 사적 모임에서나 웃는 모습이었다. (쓸쓸한 웃음이었지만) 항상 둘 다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인가 현재 피트니스에서도 외적으로는 예전 모습 그대로인 듯 보인다.

 B는 예전에는 피트니스에서는 주춤하고 서성이며 사람들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지만, 모임에서는 적극적이고 일방적이었다. 현재는 예전보다 안정된 모습인 듯하다. 예전에는 피트니스에서 혼자 붕 떠있는 무소속자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모두와 함께이려 한다.

 C는 예전에는 피트니스에서 유쾌하고 씩씩한 모습이었지만, 모임에서는 어색해하고 전반적으로 소극적이고 말없이 조용했다. 점점 예전과 비슷해지려 하지만 아직은 예전보다 덜 유쾌하고 덜 씩씩하다. 현재는 대체적으로 힘없어 보인다. 파워 있는 댄스를 즐기던 예전 모습은 아니다.

 피트니스에서는 예전에도 그랬던(즐거웠던) 것처럼 언니들과 모두 좋다. 깔끔하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는 이러하다. 물론 현재와 같이 정착된 모습이 되기 위해, 분명한 듯 모호하고 편안한 듯 불안한 순간이 있긴 했었다.

  나는? 나는 어떠했을까. 나를 한번 더 챙기기로 한다. 나는 예전 그대로다, 첫 마음만. 나는 한번 마음먹으면 그대로다. 그래서 오래 봐도 좋은 사람, 오래 보면 볼수록 더 좋은 사람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언니들을 대하는 태도, 행동은 달라졌다. 이제는 나의 오래된 지인들에게 하듯 정성스럽게 대하지 않는다. 그냥 피트니스 내 다른 언니들처럼 무심하게 대한다. 그냥 즐겁게 운동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운동으로 시작하였으니 그저 운동만 하는 게 좋다.


 3개월 반 전,,,

아마도, 피트니스에서만이라도 예전 그대로이길 바라여 균열을 막았다고 보면 된다.


그 정도는 알겠지.


“적당한 거리를 둔 관계가 마침내는 반짝인다.”


거리를 둔 관계 속에서 서로 존중할 수 있고 진정한 공감(지지)도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위로할 때가 있다. 모두(공동체)의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나 일상에서 사소한 서운함을 느낄 때다. 누군가가 나에게, 나는 하루에 한 가지씩 나를 칭찬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줬다. 그래, 나는 매일 스스로 하나씩 나를 칭찬하며(챙기며) 지낸다. 그런 습관이 나도 모르게 타인 앞에서도 나를 칭찬하고 있었나 보다. 오늘 내가 나를 칭찬하는 건, 지금 이렇게 솔직하게 쓰고 있는 글로 대신한다.


 오늘처럼 내 글은 솔직하다.


 현재는 브런치 글을 SNS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가. 원래도 솔직한 편인데 공개하지 않아서인지, 더 솔직하게 쓴다. 어떤 사실도 사건도 내가 본 대로 있었던 그대로 적는다. 물론 내 마음도 그러하다.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나는 이보다 더 솔직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마도,
나를 모르는, 나에 대해 무지의 베일을 쓴 지극히 원초적 입장일 수밖에 없는, 여기 브런치 작가들이 어쩌면 나를 좀 더 선명하게 알지도 모른다.

 Conflict...

 내가 모르던, 자각하지 못했던, 하지만 내게 존재하는 모습을 (글을 통해서) 미지의 타인들이 더 잘 알 수도 있겠구나.


 자신 있게 당당하게 사는 건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사는 걸까. 나는 내가 나를 사랑하며 나를 믿으며, 그렇게 살았다. 그 중심은 무엇이었을까.


B가 모임 중에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 말도 내게 여러 번 했었구나.


“나도 너처럼 한 번만 살아보고 싶어.”


내가 부럽다고. 내 태도가, 내 자세가 그리고 내 성격이 즉, 자신감이 부럽다며 말했었다. B는 내가 나를 알게 하고, 내가 나를 한번 더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런 고백을 했었구나. 그래도 B의 갈팡질팡에 솔직하게 말하고 솔직하게 행동하길 참 잘했다.


‘오 마이, 네 명 중에서 그래도 B와 나는 서로에게 솔직했구나!’

모임 중에 우리 둘만 자신의 감정과 의사를 밝혔구나. A와 C는 모임 중에 자기주장도, 의사도, 감정도 모두 감추었구나. 밝히지 않았구나. 자신에게 무미건조했구나. 그래도 나는 그 모든 행동을 배려해 주는 걸로 생각했었다. 그 당시엔 그런 줄 알았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이어서였다. 그런데 모임 지속 여부를 결정해야 해서 의중을 물었을 때 A와 C는 사적 모임을 그만하자고 B와 충돌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들 의사를 밝혔다. 막내인 나는 그들 내심을 들었기에 어떤 과정을 거치든 모임을 정리해야 했고, 나도 정리하고 싶었다. 운동할 때와는 달리 그들과의 사적 모임은 즐겁지 않았다.


 문득 떠오른다. 의견 없이 흐르는 대로이던 A와 C가 사적 모임을 그만하자는 말은 또렷이 밝히자, 뭔지 모를 기분에 휩싸여 B 얼굴부터 떠올랐다. B 존재를 망각한 의사결정은 A와 C가 그동안 B에게 솔직하지 않았고(B를 속였고), B를 존중하지 않았다는(무시했다는) 증거다. 그런 결정을 아무 상관없이 말하던 A와 성가시다는 투로 말하던 C에게서 ‘무심함, 나태함, 무력함, 외면, 회피, 무시, 나약함’이란 단어가 마구 피어올라 두 사람 얼굴을 덮쳐 버렸다.


 기어이 B에게는 이 내용을 전달하지 못했구나.


 A와 C, 그들 민낯을 본 기분이었다. 모임 중에는 무조건 B뜻을 묵묵히 따르기만 하더니, 그와 달리 이처럼 상반적인 (정반대) 노선을 밝혔다. 앞뒤가 다른,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판도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B에게서 A로, 그리고 C에게로 슬며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B가 A와 C의 역할을 할 차례인 양 A와 C는 의연했다. (사람이 바뀌지 않는 한,) 실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다는 걸 A와 C는 알까.


 A와 C는 모임 내내 B가 하는 행동과 결정을 무조건 좋다는 척 동조하며 한마디도 거들지 않았고 B가 하고 싶은대로 하라 했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말이다. 만나는 장소, 메뉴 등등, B혼자서 독단적으로 또는 혼자 소꿉놀이하는 사람처럼 자기 위주로 모두 결정해도 그저 좋다고 다 따랐다. 표정은 힘없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말이다.

나는 B가 신속히 결정하여 일처리해 주는 게 좋았다. 메뉴 선택, 장소 결정 등 추진력이 좋았다. 하지만 네 명인데 삼인분을 시킨다던지 저렴한 음식점만 찾던 건 맘에 들지 않았다. A는 아무말 없던 사항이지만 C는 이 불만을 B 눈치를 보며 내게만 몰래 토로했었다. 그럴 게 아니라 C는 직접 말해도 되는 위치였다. C가 가장 나이 많은 언니였다. 같은 나이였던 A와 언니였던 C가 나서야 하는데 두 사람은 B가 잘하든 못하든, 옳든 나쁘든, 좋든 싫든 간에 아무런 대꾸도 의견도 없이 자신들이 참거나 괜찮으면 그만이었고, 그리고 모든 게 귀찮은 듯 그저 따르기만 했었다. B앞에서는 그랬다.


그러더니... 그제야...

...,

자신의 행동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하고 조절하지 못할 거면 그 당시에도 따르지 말았어야 한다. 따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이 조율이다. 자신 의견을 말하고 상대에게 솔직한 모습이 아름답다. 예의껏 타인을 배려하며 자신 의사를 펼치면 그 누구도 흉보거나 싫어하지 않는다. 진정한 배려이기 때문이다.

(예의를 차려 의사를 표시했어도 배려해 주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된다. 인간관계를 삶의 활력소로 더 즐겁기 위해 하는 것이지 신경쓰이고 더 불편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A와 C는 모임 내내 왜 자신들 내심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을까. 왜 마냥 호응하기만 했을까. 그러다가 마침내는 왜, A는 확실하게 C는 넌지시 밝혔을까. 누구든 불편한 상황을 언급하는 것도 그에 대해 사과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B와 내가 좋은 기류를 위해 힘든 걸 실천하고 노력했으면, A와 C도 조금이나마 생각해 보고 자기자신을 양보하고 노력했어야 했다. 이상적인 조합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들 몫이었던 부분을 실천하고 다듬었어야 했다. 이런 과정이 늘 순탄하고 매끄럽게 이루어지던 내 인간사에서 A와 C의 행동은 삶의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뭐든 어려운 문제(갈등)를 해결해야 완전해지듯, 무엇이든지 이루고 완성하기 위해선 힘들지라도 자신의 몫과 공동의 몫을 모두 해내야 한다.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즈음에서 A와 C는 더 이상 자신들은 편치 않으니 모임을 위해서는 그 어떤 노력도 정성도 기울일 생각이 없다고 밝혔던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노력한 바 별로 없던 둘은 정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을까. 자신이 두려우니 자신만 챙기려고 무서워 피했던 걸까. 모임 중에도 미루고 피하더니 끝끝내 마무리도 미루었다.


 어쨌든 사적 모임을 정리하긴 했지만 B에게는 알려 주지 못했고 의사도 묻지 않았다. 나는 왜, A와 C의 본모습을 B에게 말하지 않았을까. 왜 말하지 못했을까. 왜였을까...


‘진실은 항상 진실이기에’ 언젠가 B도 알겠지만 B를 위해 변명해 본다.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모임을 그만 하자고 이미 두 표를 던졌기에, B가 어떤 표를 선택하든 모임은 끝난 거다. B 의사는 물어볼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이 이미 결정나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사적 모임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B에게도 알려 주려 했었다. 그런데 왜 기회를 놓친 걸까.


 아하, A가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었구나. A가 갑자기 톡방을 나가 버렸다, 감정을 ‘훅’ 실은 말을 남기고서. 자제하고 있던 (감추고 있던) 자신 속내를 그렇게 공격적으로 밝혔다. 그동안 A가 보여줬던 행동과는 완전 다른 반대 모습에 놀라서 잠시 정지했구나. A가 그런 반전 행동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A가 쌓았던 인덕이 산산이 부서졌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B가 승자가 되던 순간이다. A에게는 B와 C에게는 없던 나름의 인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여러모로 A는 언니답다고 생각했었는데, 한마디로 사려 깊고 배려심 많아 보였는데 A가 그러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런 행동으로 A는 깊은(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대담한) 인간관계는 형성하지 않는 사람이란 단서를 남겼다. 가끔 B의 들러리처럼 행동하던 모습이 의아해했는데, 나약한(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면을 가졌다는 확신을 줬다.

겉돌고 곁 따르다가, 견주고 미루다가 자신은 아무런 책임 없고 상관없는 듯 회피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한편 복합적인 상황을 견디지 못해 여린 마음을 드러내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견주거나 미루는 그 자체가 결국엔 일등 책임 이건만. 이런, 후 폭풍을 어찌하리오. 시간이 흐른 후 생각해보니 A가 돌발행동을 한 건, 모임 중에 뭔가를 많이 참았었고 그 때문에 힘들었다는 후 표현일 수 있다. 정말 네 명 모두가 나름대로 개운치 않았던 만남이었구나.

어쨌든 갑작스러운 A 행동 때문에 B에게 통보든 의논이든 뭐든 하는 걸 잊어버렸구나.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A가 한 공격적 돌발 행동을 B와 C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보통 A가 한 돌발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이상하게 여기는데, 보통 멀리하는 행동인데 B, C 두 사람은 아무런 반응도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 했다. 자신들도 늘 그런 돌발행동을 하는 사람인 양 그렇게 사는 동족이란 인상을 줬다.


“어려운 순간에 사람의 인격이 드러난다고 하지 않던가.”


하긴 C도 A처럼 외적으로는 참아주는 편이었다. 이럴 경우, 어른들이 ‘언젠간 쟤 터질 텐데.’라고 말한다. 이 말은 한쪽으로만 치우쳐 자신을 조절, 보완하지 못하면 무의식 속에 내재된 공격성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는 뜻이다. C가 피트니스에서 종종 다투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때로는 애교있게 때로는 단호하게 자신 의견을 말할 필요가 있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A가 한 돌발 행동에 놀라서 B에게 말하는 걸 놓쳐 버렸구나. 그 후엔 왜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내가 알게 된 A와 C의 본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전혀 말하지 않았구나. 그냥 소크라테스처럼 스스로 생각해 보길, 스스로 알길 바라며 질문만 던졌구나. 참으로 무서운 대화법이다. 세 명 모두, 각자 스스로 자신을 들여다봤을 거다. 모임을 정리한 가장 큰 이유가 뭔진 알까.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모든 걸 온전히 타인에게 맡기고, 타인이 스스로 느껴서 모조리 책임지게 하는구나. 참으로 효과적이지만 슬픈 대화법이구나. 오로지 혼자여야만 하는 진리가 숨어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구나, 소크라테스 혼자서 대중을 향해 호소하던 그 의미를. 과연 소크라테스는 정말 그렇게 긴 변론을 했을까. 알아듣지도 못하는 5백 명을 대상으로 정말 그랬을까.  세상 사람들은 성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실천할 리는 만무하다. 플라톤을 더 파악하면 소크라테스의 뜻을 알 수 있을까. 더 많이 더 세세히 알게 될까 봐... 플라톤 책 앞에서 서성인다.


 어쨌든, 서로에게 진심이 없는 관계를 지속할 필요는 없다. 진심이 없으면 타인을 가식적으로 대하면서 자신을 조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족감 없는 만남은 허무할 뿐이다.


 이쯤에서 또다시 생각해 본다.

A와 C는 서로에게 어색하다. B와 C도 마찬가지로 어색하다. B는 모임이 끝나게 된 연유를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B는 A와 C에게 향하는 행동을 멈추어야 한다. 원래 B와 A는 다른 계기로 연락하던 사이였지만 B는 A는 물론이고 C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자신의 상실감을 A와 C로 대신 때우려 하기 때문이다. B는 자신도 타인도 그 어떤 상황도, 그 진위를 모르기 때문에 자꾸만 잘못된 인연을 반복한다. 그때도 지금도 B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른 채 하는 행동들 투성이다. 주변에서 말해주지(챙겨주지) 않아 어쩌면 B는 순수하다. 아무리 심심해도 시간을 때우기 위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 기회주의적 만남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제 B는 B자신을 들여다보고, 착각 속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자신 생각대로만 직진하지 말고 현실과 맞닿아있는 자신,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하는 타인을 알아야 한다.

물론 A와 C도 자신만 알고 자신을 꽁꽁 묶을 게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과 함께 하는 타인도 돌보고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은 세상 사람들이 때에 따라서 나타내는 모습들이다. 어떤 면을 더 가지고 있느냐, 덜 가지고 있느냐, 그 차이일 뿐이다.


 서로 어떠하였든 간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B와 나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서로 솔직한 편이었고, 현재도 솔직하다. 서로에게 솔직해서인가, 지금 피트니스에서 B와 나는 운동을 잘하고 있다.


 A와 C는 어떠한가.

이중성과의 싸움에서 이기길 바란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행동이 다를 때 자신은 몰라도 타인은 금방 알아차린다. 휘말리기 싫어 마음속으로 참아 주기도 하고, 상황이 심각해질까 봐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실은 모두 다 알고 있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단 걸 명심해야 한다.


기본을 아는 날이 오리라, 최소한의 성의를 알리라. 무엇이 먼저인지 고민하리라, 용기 내어 자신 잘못을 인정하리라, 그리고 가리며 하는 행동들에서 솔직해지리라 여겨본다.


 시간이 흘러 지나간 일들을 생각해 보니 신기하게도 그 당시보다 더 확연해지는구나.


 ...,


 세월을 약 삼고 싶진 않건만...


 그냥 잊히거나(외면하거나) 무뎌진다면(무시한다면) 나이가 부끄러울 테니 말이다.


...,


 시간은 소중하다.

 모두에게 그저 주어져도, 사용하기 나름이다. 사용하는 사람 나름이다.


그러므로,


 “소중한 건 노력해야, 공들여야, 자신 곁에 소중하게 남아 있다.”


 (202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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