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도(불륜)에 관한 생각 ①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일명 사빠죄)”
_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2020)> 이태오 대사 가운데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_영화 <봄날은 간다(2001)> 상우 대사 가운데
맞다. 결혼을 해도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사랑(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오늘 먹을 점심 메뉴조차 아침에 생각했을 때와 막상 식당에 가서 메뉴 고를 때 마음이 달라지는데,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 즈음이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지. 결혼했다고 세상에 널린 멋진 사람들과 그들을 만날 기회가 사라지지도 않고.
중국 고장극 <옹정황제의 여인(후궁견환전)>에서 황제는 후궁들의 봉호와 품계가 적힌 수십 개의 나열된 명패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하나를 뒤집는다. 같이 밤을 보낼 후궁을 선택하는 절차로 황제가 요새는 어느 여인에게 호감이 있는지 밝히는 공식적인 의사표시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가치관으로는 사람을 마치 마트에 진열된 상품을 고르는 것 같은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모양새인데, 내가 누구를 선택하든 기뻐하고 영광으로 여기며 나와의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검증된(?) 사람들이 주변에서 늘 대기하고 있고, 관계에서 흥미가 떨어지거나 재미가 없으면 마치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고르듯 필요에 따라서 내 마음대로 관계를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니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물론, 황제와 후궁은 일반적인 연애관계는 아니며, 실제로는 권력 강화와 유지라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도구적 관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황제나 왕이 아니고, 축첩을 허용하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지도 않다. 오늘날 결혼은 일부일처제를 충실하게 이행하며, 배타적인 사랑과 헌신을 약속(일종의 계약)한다는 의미이다. 결혼을 해도 다시 누군가와 낭만적 사랑에 빠져 연애를 할 수 있지만,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므로 약속을 어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기혼자에게는 사랑에 빠진 게 죄가 된다(법적 구속은 없더라도 도의상으로). 오늘날 결혼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고, 특수한 인간관계인 부부로서의 약속을 저버렸을 때 다른 한쪽은 치명적인 심리적 내상을 입게 되므로, 결혼은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냉철하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사실 결혼뿐만 아니라 인생의 갈림길에서 두루 살피지 않고 마음과 감정이 앞서서 성급한 결정을 내리면 머지않아 자신의 선택이 착오로 드러나 그 대가를 치를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외도를 하든, 불륜을 하든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클린트 이스트우드, 1995)>처럼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배우자가 모르고, 프란체스카처럼 배우자와 자녀에게 변함없이 충실하면 상관없다는 입장인데, 불과 나흘 동안의 강렬한 사랑의 끌림과 내적 갈등을 겪은 이후로 로버트와 만나거나 연락조차 하지 않은 프란체스카조차, 남편 리처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내의 변화를 눈치채고 있었다. ‘당신에게 꿈이 있었다는 거 알아. 이뤄주지 못해서 미안해. 당신을 정말 사랑해.’ 리처드는 이를 임종을 앞두고 고백한다. 한 공간을 공유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사이란 그만큼 예민하고 가까운 관계이다. 주변에서 아무리 도덕적 잣대로 옳고, 그름을 왈가왈부해도 부부사이의 일이란 결국 그들만 안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이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에 적용하자면, 프란체스카와 남편 리처드의 관계는 애정·소속 욕구(3단계)와 존중의 욕구(4단계)에 걸쳐 있다면,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관계는 존중의 욕구(4단계)는 기본적으로 충족하고, 자아실현 욕구(5단계)를 향하고 있다. 리처드는 자신이 아내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자아를 실현하고 픈 욕구를 채워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알면서도, 아내를 끝끝내 붙들고 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해’라는 속삭임은 ‘나의 (아이 같은) 의존과 애정 욕구를 채우려면 당신의 돌봄과 헌신이 필요해.’라는 자기중심적인 의미로 들린다. 만일 리처드가 프란체스카가 계속 교사로서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도록 지원하고 응원했다면, 과연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이토록 강렬하게 빠져들었을까. 그나마 리처드가 성실하고 정직하고 온화하고 가족을 잘 돌보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라 이들의 관계가 유지되었지만, 자기와 아내의 욕구가 상충되었을 때 아내의 욕구를 알면서도 자신의 필요 때문에 아내의 꿈을 좌절시키고 성장을 저해하며 가정이라는 틀에 가뒀다는 면에서 리처드도 그 시대의 흔한 가부장에 지나지 않는다. 리처드가 만일 프란체스카를 정말로 사랑하고 그 자신이 한 인격체로서 독립된 사람이었다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프란체스카가 로버트에게 가도록 놓아주었을 것이다.
기혼자의 외도는 계약 위반이라면서 외도를 한 프란체스카를 옹호하고, 성실한 남편인 리처드를 탓하다니 언어도단 같지만, 결혼을 했더라도 자신의 한계 때문에 배우자의 성장을 저해하고 오히려 구속하게 된다면 이상적으로 들릴 수는 있지만 그 관계는 끝맺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리처드처럼 상대방이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자신을 떠날까 봐 두려워 거짓과 회피로 상대방의 욕구를 좌절시켜 자기 곁에 묶어두려 해 갈등과 혼란을 겪는 경우가 더 흔하지만.
어쨌든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서 배우자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자아 존중과 존경의 욕구를 충족하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성장의 욕구를 일시적으로 인정받고 다시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남편인 리처드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폭력이나 중독, (습관적) 외도 등의 명백한 결격사유가 없이 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나 현실 불륜과 외도는 제 가정에서의 기본적인 역할도 못하면서 인정과 애정 욕구에 굶주려 습관적이고 장기적으로 배우자를 ‘속이고’ ‘기만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기여하는 것 없이 결혼의 안정성과 경제적 혜택, 보살핌(돌봄)을 무임승차해 누리면서, 우유부단하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유지하며 불륜에서의 육체적/정신적 쾌락과 짜릿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고 한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정작 바람을 피워야 할 것 같은 사람은 가정에서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는 배우자의 몫까지 두 배를 해내느라 뼈가 빠지는데, 가정에서는 실제로 하는 것 없이 말만 앞세우고 자기 연민에 빠져 남 탓을 일삼는 한량들이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외도까지 일삼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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