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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Aug 01. 2024

외도하는 배우자의 눈에 띄는 특징 두 가지

외도(불륜)에 관한 생각 ②

*이전 글: https://brunch.co.kr/@smilepearlll/420




앞에서도 말했듯이 누구보다 예민하고 가까운 관계인 현실 부부 사이에서 외도 사실을 평생 감출 수는 없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도자의 변화는 어떻게든 티 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배우자도 긴가민가 헷갈리고 ‘그럴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하지만, 결국에는 모를 수가 없다. 외모에 부쩍 신경 쓰고 스마트폰을 붙들고 살고 약속 또는 야근이 잦아지는 등 ‘나 다른 사람 만나고 있어’라며 온몸으로 티 내지 않더라도, 우선은 평소와 다르게 배우자에게 너무 잘해주거나 (배우자가 원하는 줄 알면서도) 안 하던 말과 행동을 새삼스럽게 하거나, 예전과 달리 에너지와 활력이 넘쳐서 갑자기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인 사람으로 변하는 경우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죄책감을 반동 형성(자기 욕구, 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함)으로 덮는 것이다.




역으로 배우자가 자신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점을 악용해 오히려 배우자가 자기 자신이나 현재 결혼생활에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등 억지를 부리거나, 자신의 모든 문제를 배우자 탓으로 돌리며 죄책감을 불러일으켜 배우자가 자기 자신을 의심하도록 세뇌하는 악질도 많다. 상대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외도의 부도덕함을 떠나서 배우자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들고 정신을 황폐화시켜 자칫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악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스라이팅 당하는 사람을 특별히 자존감이 낮거나 의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유능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다른 인간관계 원만한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가스라이터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가스라이팅은 대부분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고, ‘사랑하면 을이 된다’는 말처럼 사랑하니까 잘해주고 싶고 어느 연애에서도 부족한 점은 있기 마련인데, 연인관계에서 자신이 갑의 위치에 있다고 판단해 주도권을 절대 놓지 않고 상대를 조종하려는 사람은 바로 이 상대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약점을 감싸주고 보완하려 하지 않고, 이 틈새를 기막히게 파고들어 관계에서 책임감 강하고 완벽하고자 노력하는 상대의 죄책감을 절묘하게 자극한다. 스라이팅 당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정직하므로 상대도 정직하리라고 믿는 순수함과 순진함을 악용당한 것이기 때문에, 배우자가 외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배신의 충격과 심적 고통을 엄청날 수밖에 없다.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잘해줬는데도 나로는 성에 안 찼던 거야? 내가 뭘 잘못한 거야? 내가 그렇게 싫었던 거야?’ 같은 혼란과 분노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능한 나르시시스트이자 훌륭한 가스라이터인 외도자는 오히려 당당하다. 사과는커녕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지 않냐’라며, ‘자신이 다른 사람을 만난 건 다 네가 자신에게 관심이 적고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부도덕한 행동의 이유를 ‘배우자의 잘못(책임)’으로 돌리는 몰염치함으로 계속해서 가스라이팅을 이어간다. 이때 외도자에게 단단히 세뇌당한 사람은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을 의심하며, 명백히 사과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도 오히려 외도자에게 ‘네 마음을 모르고 내가 너무 소홀했다’라며 사과를 하고 매달리는 기막힌 장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같이 사는 친밀한 관계의 외도자가 자신을 을의 위치에 놓는 세뇌에 시나브로 익숙해져 현실감각과 판단력이 지나치게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주변 사람들의 조언과 여러 매체 등을 접하며 ‘뭔가 좀 이상한데?’라며 지금껏 ‘옳다고 믿은’ 세상을 의심할 때, 자기 자신의 믿음과 순진성에 균열이 생긴다. 무너진 판단력을 회복해 현실을 직면하는 순간, ‘세상 누구보다 굳게 믿은 사람이 자신을 감쪽같이 속이고 철저히 배신, 이용했다’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감과 수치심, ‘나는 지금껏 대체 뭘 한 거지? 왜 그렇게 배우자에게 맞추고 억압당하고 산 거지?’ 싶은 허망감과 자괴감이 밀려온다.


무엇보다 절대 사과하지 않고 떳떳하기만 한 배우자의 이해 불가한 태도와 행동이 가장 혼란스럽다. 만일 내가 외도를 했다면 배우자에게 미안해서 무릎이라도 싹싹 꿇고 밤새도록 용서를 빌고,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당당함을 넘은 뻔뻔스러움에 인간 존재에 대한 혐오감마저 생긴다. 자신의 기존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도저히 이해 불가한 이 현상과 상황을 수용하지 못하고, 경직되고 순진한 사고방식을 고집하며 계속 부정하고 거부하면, 안타깝지만 깊은 우울과 불안, 인간과 세상에 대한 믿음 상실, 고립감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정서만이 남게 된다.




만일 사랑의 상처와 고통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면, 우선은 그의 배신은 ‘나의 잘못이 아니다. 원래 그럴 사람이었다. 인품과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어도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라는 말을 꼭 하고 싶다. 물론, 결혼은 평생 서로에게 헌신하겠다는 약속이지만 그럼에도, ‘약속은 얼마든지 깨질 수 있고, 외도나 바람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며, 어떤 불행이든 나에게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는 내 믿음과 사랑을 악용해 속였을지언정, 그럼에도 누군가를 열렬히 믿고 사랑하고 지지한 나 자신에게 ‘훌륭하고 잘했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이제는 누구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연애할 때와 달리 배우자는 딴 사람으로 변했다. 나를 무시하고 방치하고 섹스도 예전 같지 않다. 배우자는 나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집에서 내 존재감은 없고, 그에게서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며, 외롭고 공허하다. 다만, 나는 사랑받고 싶었을 뿐이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잘못은 아니잖아!’


외도를 한 사람의 이 같은 자기변명은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대체 왜 배우자는 딴 사람으로 변했을까? 배우자도 자기만큼이나 결혼생활이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배우자로서는 결혼 뒤 감당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반복해서 강요받거나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을 가능성이 높다. 결혼생활이라는 마차는 양쪽의 두 개의 바퀴가 나란히 속도를 맞춰서 같이 굴러가야 하는데, 결혼생활에서 수반되는 여러 의무와 책임을 배우자 일방에게 과도하게 지우고, 자기는 가만히 멈춰 서서 배우자가 혼자 끌고 가는 마차에 무임승차해 이득을 보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인생 자체가 버겁고 매일이 한계인 배우자에게 ‘나를 바라봐 줘. 나를 사랑해 줘’라고 차마 겉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애정을 갈구하며 배우자를 원망하기보다, 불필요한 외부 약속을 줄이고 일찍 귀가해 아이들과 놀아주며 수건 한 장이라도 더 개키고, 원가족의 무리한 요구에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자기 가족을 보호하고 우선시하며 가정에 ‘기본적으로’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면, 배우자의 태도와 행동도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긴, 이런 성품과 센스를 갖춘 사람이라면 애당초 결혼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도 않았겠지.


무엇보다 외롭고 공허하고 사랑받고 싶다고 누구나 배우자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 당장 배우자만 하더라도 자기처럼 결혼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자신이 한 결혼이라는 선택에 책임을 지려고 매일 고군분투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 사이의 갈등과 문제를 두 사람의 역동이 빚어내는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외도한 사람의 자기 방어는 핑계 없는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 <옹정황제의 여인>의 황제처럼 버림받을까 봐 그래서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 누구도 진실로 믿지 못해서 얼마든지 바로 교체할 수 있는 피상적인 대안을 만들어 두고, 연애 초기나 썸에서 도파민이 마구 분출되는 설레고 짜릿한 정서적, 육체적 쾌락 없이는 견딜 수 없는, 갑자기 외롭고 공허해서 외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외로움과 공허함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벗어날 생각도 없는, 현실 도피의 짙은 애정결핍의 그림자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외도를 불륜이라고 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외도라고 다 같지는 않다. 정말로 시대와 상황, 자기 자신과 배우자의 한계 때문에 외도에 이르기도 하고, 시대와 상황, 사랑의 대상을 막론하고 이에 상관없이 외도를 일삼기도 한다. 이때 외도하는 사람의 사랑이 외도 수준에 불과한지 진정한 사랑인지 판가름하는 기준은 존중과 일관성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외부의 시선에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불륜인지라도 여느 인간관계처럼 외도하는 두 사람 사이에 변함없는 존중과 사랑하는 마음이 뒷받침된다면, 이들을 과연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에서는 현실 회피와 육체적, 정서적 쾌락에 사로잡혀 가정을 도외시하는 불륜이 다수라서 문제이지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외도자의 의사도 존중해야 한다. 외도한 배우자의 배신이 충격과 상처가 아니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계약을 파기하고 나와 다른 길을 가겠다는 의사는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니까. 다만, 혼인계약 파기에 따른 배상은 충분히 지급해야 마땅하고. 배우자의 외도 때문에 이혼에 이르렀을 때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수준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자의 유책으로 이혼에 이르고 가정이 깨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돈이 유일한 배상이자 위로이기 때문이다. 한편, 순전히 애정이 고파서, 연애 감정이 그리워 외도를 해 이혼에 이른 사람은 대문호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와 브론스키의 열정에 사로잡힌 불안정하고 폐쇄적인 사랑으로 증명했듯이 인생이 평탄하지 않고 그 끝도 좋을 리는 없지 않을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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