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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20. 2021

온과 함께 떠난 첫 우주여행

<어둠의 왼손>과 함께 한 차갑고도 따뜻했던 순간들

어떤 책과의 만남은 우연하고도 운명처럼 다가온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어둠의 왼손>과의 만남도 그렇다. 작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내게 SF, 판타지 소설이란 쉽게 손을 내밀 수 없는 장르였다. 그럼에도 내 책장엔 그가 쓴 글쓰기 책인 <글쓰기 항해술>과 말년에 낸 수필집 <내겐 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가 꽂혀있다. 그 사이 몇몇 SF단편 소설들을 접하면서 SF라는 장르에 대해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어느 8월의 여름, 도서관에서 나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때 나는 임신 8개월이었다. 임신 중기 쯤에 들어섰을 때, 그런 상상을 했다.


남자도 임신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서로 협의한 상태에서 누가 임신을 할지 결정하고 그 사람이 임신을 할 수 있다면.


임신 이후 신체나 정서적으로 조금씩 달라진 것들이 있는데,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 이해받고 싶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냥 배가 나오고 있을 뿐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 때때로 예기치 않게 끊임없이 졸음이 몰려온다는 것, 태동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어떤 움직임은 나를 위로하는 듯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안의 다른 생명체의 존재감을 매우 강하게 느낀다는 것 등. 한편으로는 출산과 출산 직후 몸의 상태, 그 이후의 사회복귀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등은 직접 이 상황을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임신의 기쁨과 슬픔, 이 모든 것을 제한적인 말로 하는 대신 직접 경험한 누군가와 공감하고 공유하고 싶었다. 대개의 경우, 나를 나아준 엄마나, 임신과 출산 경험이 있는 친구나 지인들이 공감의 대상이 될 것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모두 여성이다. 나는 남성들과도, 남편이나 남사친, 남자 동료들과도 간접적인 체험으로써 건네는 말이 아니라 이 모든 과정을 함께 겪은 이들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유대감과 공감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과 내가 원하는 수준의 공감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을 빌려와서 읽기 전까지만 해도, 이 책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다. 이 책을 집어든 이유는 ‘어슐러 르 귄’의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고, 한국에서 출판된 걸작선 시리즈 중 가장 첫 번째 책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이야기가 나의 갈급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서문을 읽고 나서이다.



SF소설이 말하는 것

서문부터 강렬하게 끌렸다.

SF는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묘사한다

그건 곧 단순히 여기에서 멀리 떨어진 우주의 어느 행성 혹은 아득히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맞닿아있는 무엇을 조금 다른 상황에 놓고 ‘은유’로 말한다는 것이었다. 그걸 두고 ‘사고실험’이라고 했다. 나에겐 그게 필요했다.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여기가 아닌 먼 곳을 상상하고 경험한 뒤, 결국 다시 지금 여기로 돌아와 나를 조금 다른 시선으로 돌아보는 것.


서문에서 이 소설이 ‘양성병존’인 상태의 한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를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그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니면서도 특정 시기에 호르몬 작용에 의해 여성 혹은 남성이 될 수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다시 디폴트인 남성도 여성도 아닌 상태로 돌아온다.


나는 예언하거나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묘사하는 것이다. (…)
그게 어떤 소설이 되었든,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것이 모두 허튼소리라는 것을 숙지해야만 하며, 그러면서도 읽는 동안에는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그 소설을 다 읽었을 때, 훌륭한 소설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읽기 전과 조금은 달라졌음을, 조금은 바뀌었음을 깨닫게 되리라.
— 1976년의 서문 중에서 —


서문의 말을 지침삼아, 용기를 갖고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건 그 자체로 모험이자 여행이다.




<어둠의 왼손>이 그리고 있는 세계


소설의 공간적, 시간적 배경

이 소설의 배경은 ‘게센’이라는 추운 겨울만 지속되는 행성이다. 이 행성에는 국경을 마주하고 분쟁 상태에 있는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이라는 2개의 큰 국가와 빙원지대, 몇 개의 소수 국가들이 있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인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인류의 특성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뚜렷한 성(gender)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양성병존의 상태다. 호르몬 변화에 의해 특정 시기에 남성 혹은 여성으로 신체적 특성이 바뀌며 짝짓기를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면 남성도 여성도 아닌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이 행성에 ‘에큐멘’이라는 인류 연합에서 보낸 특사 ‘겐리 아이’가 홀로 파견된다. 그의 임무는 인류의 연합인 ‘에큐멘’과 ‘게센’이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하도록 개방의 물꼬를 트는 것이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이야기, 그러나 조금 다른 시선

흔히 생각하는 외계의 존재가 나타나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면, 광활한 우주를 여행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낯선 행성에 불시착하거나, 특정 목적을 가지고 다른 행성에 나타나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현지에 사는 생명체들과 대립하거나 하는 이야기들이 익숙하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


겐리 아이는 수행해야 할 임무를 갖고 스스로의 의지로  게센이라는 낯선 행성에 홀로 도착했다. 그곳에서 자신이 온 목적과 이유,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다. 그렇기 때문에 현지의 인류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 행동하게 해야 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바로 어떻게 그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즉, 새로운 인류와의 교류를 받아들이게 하는 과정,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끈덕지게 풀어낸다.


겐리 아이라는 외계의 특사가 홀로 왔다는 것 외에 한가지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에큐멘은 낯선 행성에 한 명의 특사를 파견하기 전에 미리 선발대를 보낸다. 하지만 선발대는 스스로 외계에서 온 인류임을 밝히지 않고 현지에서 몸을 숨기고 조사를 하는데 역할만을 수행한다. 새 행성의 문화, 언어, 역사를 파악하고 그것을 특사에게 교육시키고 그를 습득한 특사 1명만 먼저 파견된다. 이 특사가 행성인들이 에큐멘의 다른 인류들과 교류할 의사가 있음을 이끌어내면, 그때 비로소 교류가 시작되고 다른 인류들이 행성에 나타날 수 있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교류를 시작하는데 이토록 평화적이면서도 이타적인 방법을 이 소설에서 처음 접했다. 현지인들이 알지 못하는 외계에 대한 두려움에 떨도록 상황을 몰아가지도 않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도 없다. 한편으로는 효율적이지도 않다. 한 명의 이방인이 낯선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제한적이고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겐리 아이가 게센이라는 행성의 카르히데에 도착하고 나서 2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시작한다. 겐리 아이는 이방인으로 이 행성에 2년간 머물면서 본인의 임무를 다하려 하지만 특별한 진척은 없다. 이곳엔 이곳만의 삶의 방식과 정치, 문화가 있고, 적절한 기회에 왕을 만나 직접 이야기할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해주던 수상 ‘에스트라벤’은 더이상 그를 후견할 수 없다는 말을 전하자마자 카르히데에서 반역자로 낙인 찍혀 추방되고 만다. 어렵게 만난 왕 마저도 현재 자신의 나라를 통치하는 것으로도 벅차니 어서 이곳을 떠나라고 한다.


한 마디로 특사 겐리 아이는 혼자서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 상태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는 과연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다음 이야기 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이 매력적인 세가지 이유


하나. 우리와 다른 존재에게 어떻게 마음을 열어야 할 것인가


이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서로 다른 존재가 마음을 열고 진정한 이해와 공감에 이르는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서로의 시점에서 번갈아가며 치밀하게 묘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인물에 대해 다시 판단을 내리고 결국엔 그와 함께 공감한다.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이야기의 전개

그 두 인물은 에큐멘에서 파견된 첫 번째 특사 ‘겐리 아이’와 반역자로 몰려 추방당한 카르히데의 전 수상이자 특사의 후견인이었던 ‘에스트라벤’이다. 당연하게도 남성인 아이에게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게센인들은 낯선 존재이다. 2년동안 뚜렷한 진척없이 시간을 보내고 결국 더이상 아이를 도울 수 없다고 말하는 에스트라벤을 그는 더더욱 신뢰할 수 없다. 왕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던 에스트라벤 마저 반역자로 추방당하고 자신도 쫓겨나다시피 한 상황에서 아이는 포기하지 않고 게센, 이 춥고 척박한 겨울 행성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아이는 ‘한다라’라고 하는 종교 교인들이 모여 생활하는 성채로 떠난다. 그곳엔 미래를 예언하는 예언자들이 모여있다. 이곳에서 아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5년 안에 게센이 에큐멘의 일원이 되겠는가?"


그것은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고 아이 스스로 답을 알지 못하는 질문이었다. 예언자들은 예언의식을 치르고 그 예언이 행해지는 동안 지켜보던 아이는 ‘마음으로 대화하는 능력’이 발휘되어 그 대답을 듣는다.


아이는 카르히데와 국경을 마주한 ‘오르고레인’으로 가서, 다시 한 번 에큐맨과 게센의 교류라는 본인의 임무를 이어가게 된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추방당한 에스트라벤을 만나게 된다.


안타깝게도 오르고레인에서도 아이의 임무는 쉽게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 갇히는 상황에 처한다. 그때 에스트라벤이 아이를 구해 다시 한 번 카르히데로 가서 그의 임무를 이어가게 돕는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2/3 지점이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카르히데로 가는 길은 고브린 빙원을 넘어 가야 하는 고된 여정이다. 이 여정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를 조금씩 풀어가며 우정을 쌓는다.


험난한 여정을 함께 하며 비로소 서로를 이해하게 되다

극한의 추위를 헤치며 언제 끝이 날지 확신할 수 없는 여정을 이어나가며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그동안 서로를 오해했음을, 그 오해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간다. 동시에 오해를 걷어내고 이해로 넘어간다. 이 과정이 매우 치밀하고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그들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그들이 이해의 순간을 마주하는 장면을 보고 깊이 감동하게 된다.


다음은 그 한 장면이다. 서로를 친근한 이름으로 처음 부르는 장면이다.


“그 ‘씨’ 역시 우리와 함께 고브린 빙원을 건너는 건가요?”
에스트라벤이 고개를 들더니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이름은 겐리 아이입니다.”
“압니다. 당신은 저를 영지 이름으로 부르지요.”
“저도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릅니다.”
“하르스.”
“그러면 전 아이입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사람이 성 대신 이름만으로 부릅니까?”
“화로 형제나 친구들이지요.”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폭 8피트 텐트에서 고작 2피트가 떨어져 있음에도 그의 목소리는 마치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정직보다 오만한 게 또 어디에 있을까? 추위를 느낀 나는 내 털가죽 침낭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잘 자요, 아이.” 외계인이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외계인이 말했다. “잘 자요, 하르스.”
— 293p


그렇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낯선 존재, 외계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진정한 이름으로 불러준다면, 태어난 행성이 다르다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겐리 아이가 게센이라는 낯선 행성에 오기로 결심하면서 가족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까지 감수했다는 것을 에스트라벤이 알게 되는 장면이다.


오래전 에르헨라에서 아이는 별과 별 사이를 거의 빛처럼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우주선 안에서 시간이 얼마나 짧아지는지 내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이 인간의 수명 또는 그가 떠나온 세계의 사람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른 속도로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이동하면서 겨우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가 고향에 두고온 사람들은 늙고 죽으며 자식들이 늙어간다…… . 마침내 내가 말했다.
“저는 저 혼자만 추방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위해서, 저는 당신을 위해서지요.”
아이가 말하더니 다시 소리 내어 웃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살짝 생기를 돌게 하는 소리였다.
— 305p


이 소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존재가 어떻게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가는지 묘사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가 아니라 그들이 이해에 가닿는 상황들을 묘사한다. 그리고 그 묘사만으로 이야기를 읽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렴풋하게 나마 체득한다.

이게 이 소설의 첫 번째 매력이다.



둘. 흥미롭고 치밀한 사고실험


앞서 말했듯이 게센인들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상태로 있다가 호르몬 주기에 맞춰 여성이 되기도 하고 남성이 되기도 하는 우리로서는 다소 낯선 생명체이다. 그들의 이러한 특성과 빙하기에 가까운 추운 자연환경 때문에 이들은 다른 인류와 다른 몇가지 특성을 갖는다.


양성병존와 혹독한 자연환경에 놓인 인류, 이것이 작가가 진행한 사고실험이다. 작가는 이 세계를 매우 그럴듯하게 그려내어 그 속에서 책을 읽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놀라운 사고실험이 담긴 책이 지금으로부터 50년전 1969년에 출간되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남성과 여성, 상호불가해함을 넘어서

이 독특한 사고실험에서 남여가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다름 때문에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음을 여러 장면에서 보여준다. 그 장면들은 서로 이해할 수 없으니 당연하다가 아니라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일말의 희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 한 장면은 이렇다. 빙원에서 힘든 여정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에스트라벤은 아이가 아프고 지친 상황이라고 생각해 쉬라고 배려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보다 체격도 작고 남성이라기 보다는 여성에 가까운 신체적 특성을 갖고 있는 에스트라벤이 자기의 보호자인듯 행동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기고 대립한다. 다툼을 통해 아이는 에스트라벤이 자신을 약자로 취급하고 상대적으로 스스로를 강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환자라고 판단하고 배려해 줬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에스트라벤은 보호자처럼 행동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는 내가 병이 났으며, 환자는 지시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에스트라벤은 솔직했고, 내게도 그런 솔직함을 기대했다. 아마도 나는 그런 솔직함을 보일 수 없을 터였다. 어쨌든, 그에게는 괜한 자존심을 세우고 싶어하는 남자다움, 사내다움의 기준이란 게 없었던 것이다.


여정의 중간에 호르몬의 변화를 느끼고 에스트라벤은 아이를 의식적으로 멀리한다. 그제서야 아이는 자신이 왜 에스트라벤을 쉽게 믿지 못했는지 자각하게 된다. 그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는 낯선 사실이 가져다 준 두려움 때문에 그를 믿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나는 그토록 보게 될까 두려워했던 것, 에스트라벤에게서 보고도 애써 못 본 척해 왔던 것을 다시금 보고야 말았다. 그가 남자인 동시에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 그전까지 나는 에스트라벤을, 그의 진정한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게센에서 나를 믿는 유일한 사람이며 또한 내가 불신하는 유일한 게센인이라던 에스트라벤의 말이 올았다. 에스트라벤은 나를 인간으로 완전히 받아들여준 유일한 이였던 것이다. 그는 나를 개인적으로 좋아했으며 내게 개인적으로 충실했다. 따라서 내게도 같은 정도의 인정과 받아들임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여자인 남자, 남자인 여자 에스트라벤에게 신뢰와 우정을 주고 싶지 않았었다.


보고 싶지 않았던 실체를 마주하고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이는 에스트라벤을 믿고 우정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그 다름의 차이가 크다면 두려움은 더 깊어지겠지만 반대로 함부로 적대시 하지 못한다. 혹은 적대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식물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하지만 다른 모든 것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단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를 더 크게 느끼고 쉽게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배제하려 한다. 인종이나 태어난 국가가 다른 외국인, 심지어 다른 지역 사람, 다른 세대, 다른 성별 등.


때로 내가 너무 시야가 좁기 때문에 더 쉽게 타인을 배제하고 혹은 소외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SF소설을 읽을 때 나는 그 시야를 잠시나마 넓힐 수 있다. 그리고 다시 현실에 돌아왔을 때,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한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것들  

이 사고실험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게센이 1년 내내 춥고 눈이 오는 자연환경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외에 동물도 다양하게 존재하지 않고, 식생도 한정적이다. 과학의 발전으로 운송수단도 있지만 눈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며 대신 썰매나 스키를 주로 이용한다. 다양한 눈이 내리기 때문에 눈과 날씨를 표현하는 언어가 세부적으로 존재한다.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한 환경이기 때문에 자살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겨진다. 또한 대규모 학살이나 전쟁의 역사가 없다.


이처럼 생물학적 인류의 특성과 자연환경을 결합한 사고실험을 치밀하고 납득가능하게 그려낸다는 점이 이 소설을 두 번째 매력이다.

 

셋.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인물들이 가져다 주는 감동


소설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특정 인물에게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고, 혹은 전혀 다른 면모를 갖고 있는 인물에게 감탄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요 등장인물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내가 갖고 있진 않지만 갖췄으면 하는 어떤 덕목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 모습에 감동하고 응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그 덕목은 바로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한 걸음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아이는 자신이 자원해서 게센 행성에 왔다. 그곳에서 게센이 에큐멘이라는 인간 연합의 새로운 일원이 되게 하기 위해, 서로 교류를 하며 새로운 인류를 이해하고 넓히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한다.


이보다 더 대단함을 보여주는 이는 에스트라벤이다. 그는 외계에서 온 낯선 이방인 아이의 말을 믿고 그가 하려는 일이 결국 자신의 동족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임을 믿는다. 그 속에 개인의 이해나 특정 국가에 대한 배타적인 애국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역사의 흐름을 감지하고 행동해 나감에 있어서 허튼 허영이나 명예를 내세우지 않는다. 이토록 완벽한 인물이 있나 싶을 정도다.


다음 장면은 에스트라벤이 특정 국가의 이익을 위해 아이를 돕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화이다.

 

“이 복잡하고 비밀스럽고 권력 투쟁과 음모가 난무하는 계획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에스트라벤?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
“저는 당신이 원하는 그걸 원합니다. 저의 세계와 당신의 세계가 동맹을 맺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제가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이글거리는 스토브를 사이에 두고 한 쌍의 나무 인형처럼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가 동맹을 맺는 상대가 오르고레인이더라도 말입니까?”
“그 상대가 오르고레인이더라도 말입니다. 카르히데도 곧 그 뒤를 따를 것입니다. 제 동족 모두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는데 제가 시프그레소나 따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두가 눈을 뜬다면 어느 나라가 먼저 눈을 뜨느냐가 뭐 그리 대수입니까?”


다음은 에스트라벤의 강한 신념과 인내 그리고 실행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위험 속에 영광이.” 에스트라벤이 말했다. 속담인 게 분명했다. 뒤이어 나지막이 이렇게 덧붙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카르히데에 도착하는 날, 굉장한 영광을 얻게 될 겁니다…… .”
에스트라벤의 말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정말 카르히데에 도착할 수 있을 것만 같은, 800마일을 걸어서 빙하기 한겨울 폭풍을 뚫고 짐승 한 마리 없고 추위를 피할 곳 하나 없는 산과 협곡과 크레바스와 화산과 빙하와 빙원과 얼어붙은 습지와 만을 가로질러 정말로 카르히데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에스트라벤은 지난날 에르헨랑에서 비계에 서서 꽤기돌에 모르타르를 바르던 미친 왕을 바라보던 때와 같은 완고함과 강한 인내심으로 일기를 쓰며 말했다. “우리가 카르히데에 도착하는 그날이 오면…… .”
그가 말하는 ‘그날’은 더는 기약 없는 희망이 아니었다. 그는 겨울을 네 번째 달 나흘째 되는 날, 안네르 아르하드에 카르히데에 도착할 계획이었다.

아이와 에스트라벤 모두 당장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거나, 자기 세대에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길 바라기 때문에 행동을 시작에 옮긴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자처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미래의 누군가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이렇게 현재의 내가 아니라 미래의 누군가를 위해 강한 신념과 의지로 앞으로 나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자아내는 감동이 이 소설이 갖고 있는 세 번째 매력이다.  

 



이 소설을 나의 몸 속에서 한참 자라고 있는 온과 함께 읽었다. 그해 여름, 차가운 겨울의 행성을 온과 함께 여행한 시간들은 내 몸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때론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멀고 기나긴, 슬프고도 아름다고 여행을 떠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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