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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물자국 08화

쏟아진 것들

by 스밈

유달리 버텨내는 하루가 있다. 사는 게 아닌 살아내는 하루.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고, 출근하고, 일하고, 밥을 먹고, 다시 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 씻고, 잠들고.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면 또 같은 하루가 시작된다. 지독하게 꼭 닮은 하루들. 어떤 날들은 유난히 더 길다. 몸에 밴 행동들이 나를 움직이는 게 고마운 그런 날들. 그런 날들엔 유독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실수를 하고 만다. 가령 지금처럼. 기껏 채운 물컵을 엎지른다든가 하는.


탱그랑.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보인다. 하루가 긴 날은 순간들도 더 늘어지는 건가, 하고 순간적으로 궁시렁대어 본다. 그리고 이런 날의 기력은 딱 거기까지다. 궁시렁댈 기력. 딱 그만큼. 쏟아진 물을 닦을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나지 않아 그 자리에 한 동안 서 있다.


순간 왈칵 눈물이 솟는다. 그러게 이런 날은 더 조심해야 한다. 자칫하면 약간의 방심에도 날카롭게 깨져버리고 마니까. 그러게 조심했어야지. 조금 더 긴장했어야지. 자책해 봐도 이미 엎질러진 물에는 소용이 없다. 바닥을 타고 퍼지는 물이 나의 발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뜨거움이 솟아오르는 나와 달리 바닥의 물은 한없이 차다. 물은 어느새 바짓단을 타고 올라오며 옷을 적신다. 차디찬 감촉에 더욱 서러워져 마구 울음을 토해내고 만다. 나의 설움이 보이지 않나. 들리지 않나. 누가 나를 알아주려나.


엎질러진 물은 닦으면 그만이고 깨진 컵은 치우면 그만일 텐데. 하루가 유난히 길었던 탓이다. 닦아내기도 치워내기도 버겁도록 긴 하루를 보낸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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