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 정도 가지고. 그나저나 배 안 고파요? 여기까지 왔으니 맛있는 스시 먹으러 갈래요? 아, 미국에선 아침부터 날 생선살이 올려진 스시 같은 건 안 먹나?”
“회사 안 가도 되요?”
“어제 늦게까지 근무해서 오늘은 오후에 출근하면 되요. 같이 아침 먹고 그쪽을 데려다주고 나도 집에서 한숨 자고 샤워하고 나가려고요.”
“그렇구나. 잘됐네. 그런데 정말 아침부터 스시를 먹을 기분은 아니네요. 괜찮으면 우리 다른 거 먹어요. 도쿄 좋아해요?”
“네?”
“하하, 뭘 그렇게 놀라요? 도시를 통째로 먹자는 이야기도 아닌데. 도쿄에 올 때마다 꼭 한 번은 아침 먹으러 가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 있으면 아, 내가 도쿄에 와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어딘데요?”
“시부야로 가요. 그런데 거기 열려면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
“도쿄 자동차 투어 시켜줄 테니 걱정 말아요.”
여전히 출근시간이라고 하기엔 이른지 거리가 한산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밝은 도쿄의 모습을 도로 위에서 바라보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주인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라디오 볼륨을 한껏 올리고는 창문을 내리고 도쿄의 냄새를 맡았다. 새벽에 나올 때만 해도 차가웠던 공기는 따뜻하게 바뀌었고, 온도차 때문에 습기라도 형성됐는지 비가 올 때 맡을 수 있는 자동차 냄새, 아스팔트 냄새, 콘크리트 냄새가 올라왔다. 거기에 가로수들의 가지에서 싱싱하게 샘솟는 신록의 냄새도 함께 실려 왔다.
건물들 사이사이로는 파리의 에펠탑을 본떴다는 도쿄타워가 보였다. 저 꼭대기에도 아직 안 올라가봤지. 그리고 너무나 일본적인 곡선으로 지어져 ‘여기 일본이오!’하고 외치는 것 같은 긴자의 웅장한 가부키 공연장을 지났다. 밤에 조명으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뒤에는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제는 새 역사에 밀려 초라해진 옛 서울역 건물과 비슷한 도쿄역이 보였다.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을 일제 강점기의 세대들이 지금의 서울역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졌다. 스러진 영화를 아쉬워할까 생각하는 사이 창밖의 풍경은 녹차의 물 같이 진한 초록색 강물이 묵묵히 흐르는 간다(神田)강으로 바뀌었다. 언제나 사람과 차로 붐볐던 신주쿠, 하라주쿠의 거리를 한산하게 지나가려니 내가 혹시 도쿄를 모형으로 만든 세트에 와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대중교통으로 다니면 꽤 시간이 걸렸을 이 모든 곳을 차로 다니니 이렇게 빠르고 신속하게 둘러볼 수 있구나. 색다른 느낌의 도쿄관광이라 너무 좋았다. 옆에서 운전 중인 케스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침식사는 내가 꼭 대접해야지.
드디어 시부야에 도착, 주차장에 차를 놓고 호텔의 맨 위층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올라갔다. 이른 시간부터 흐트러짐 하나 보이지 않는 호텔직원에게 둘이라고 이야기하고 긴 복도를 따라 갔다. 왼쪽으로는 건물이 빽빽한 도쿄가 보였다. 내 자리에서는 시부야의 복잡한 횡단보도, 아직은 신록으로 싱그러운 신주쿠 교엔, 도코모 타워, 늘 올려다보기만 했던 도쿄가 한눈에 들어왔다. 어디 그뿐인가, 저 멀리 꼭대기에 하얀 모자를 근사하게 쓴 후지산까지 보였다.
“와, 도쿄에 이런 곳이 있었네요. 이 시간에는 저 횡단보도에조차 사람이 없군요.”
“한산해서 좋죠? 그런데 한 시간만 지나 봐요. 평소의 모습을 되찾게 될 테니까. 아무튼 전 도쿄 올 때마다 꼭 한 번은 여기서 아침식사를 하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요.”
“내가 생각을 방해하는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늘 경매 구경 편하게 너무 잘 해서 저도 뭔가 보답하고 싶었어요. 고마워요.”
“저야말로 덕분에 구경 잘 했어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시장의 모습을 보니 삶의 활력소도 얻었고요.”
“다행이네요. 참, 나 케스케의 조언이 필요해요. 아까 참치경매 하는 거 보고 소설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소설이요?”
“우선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가 식당에서 먹게 되는 참치 한 조각에 참치의 영혼이 0.00000003% 살아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주인공인 참치가 자신의 일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펼치는 거예요.”
“흥미롭긴 한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생각인데요? 참치의 종류도 다양하고 종에 따라 서식지가 다를 테고 그러면 성장과정도 다를 텐데요. 다른 나라들은 어떤지 몰라도 일본에는 양식하는 참치도 있거든요. 참치의 생태에 대해 자세하게 다룬 서적과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봐야겠군요. 게다가 요리 이야기가 나온다면 참치의 경우 부위별로 가격과 맛, 요리법이 천차만별이라서 그것들을 다양하게 먹어보지 않는 이상 알 길도 없을 테고. 제가 보기에 만만한 일은 아닐 것 같은데요. 또 소설이란 게 그렇잖아요. 장기간의 조사를 통해 검증 된 정보를 이용해서 써야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죠. 특히 일본 사람들은 워낙 참치를 좋아해서 잘 쓰지 않으면 엄청난 비판을 받게 될 확률이 높아요. 한국 사정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네?”
침착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한국이라는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거짓말을 들킨 건가?
“한국사람 맞죠? 괜찮으니 솔직히 이야기 해봐요.”
“그걸 어떻게......?”
“어찌나 일본어를 잘하는지 하마터면 정말 속을 뻔했어요. 그런데 아까 가방이 열리는데 한국 여권이 보이더라고요. 한국 출장이 잦아서 한국여권표지색깔이 진한 초록색이란 걸 알았거든요. 미국은 남색이죠, 아마? 그런데 왜 속였어요?”
“그냥, 재미있어서요. 여행을 하다보면 가끔 그렇게 가상의 자아를 만들곤 해요. 진짜 나에 대해서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건 심심하잖아요. 그리고 사실 케스케를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도 못했고. 이렇게라도 들키고 나니 속이 시원하네요. 속인 건 미안해요.”
“하하, 그랬군요. 이유가 마음에 드니 용서해드리죠.”
얼굴이 화끈거렸다. 분명 귀 밑까지 벌개졌을 것이다. 거짓말을 들킨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참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의 영감을 얻었다며 좋아했는데, 막상 케스케의 말을 들으니 완성까지는 아직 여러 가지 난관이 기다린다는 생각 때문에 맥이 빠졌다.
“언제 돌아가요? 시간이 좀 있으면 내가 방송국에 있는 자료를 찾아서 줄게요.”
“아, 아직 며칠 더 시간이 있어요. 정말 그렇게 해주실래요? 그럼 저야 너무 감사하죠.”
“대신 한국에 돌아가서 헤매는 일본 관광객들 있으면 친절하게 잘 대해주기에요.”
“그럼요, 당연하죠. 그리고 아시죠? 혹시 한국에 놀러올 일 있으면 가이드가 있다는 사실!”
이틀 뒤 케스케는 정말 방송국에서 참치에 대한 자료를 찾아서 가져다주었다. 몇 가지 다큐멘터리와 일본 전역의 다양한 참치 맛집에 대한 영상자료였다. 뿐만 아니라 돌아가기 전에 시간을 내서 서점에서 찾아보라며 참고도서목록까지 적어줬다. 그냥 우연히 역에서 만난 남자가 이렇게까지 도움을 줄줄은 정말 몰랐다. 나는 숙소 앞까지 일부러 자료와 목록을 가져다준 그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