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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nowfield Oct 01. 2024

굴 생채


  매년 가을이면 인천에 사시는 시어머님께서 꼭 챙겨주시는 음식이 있다. 바로 굴을 듬뿍 넣은 무 생채다. 어머님의 전화가 울리면 돼지고기를 삶고 알배추도 씻어놓고 택배가 도착하기만 기다린다. 생굴은 생각보다 손질이 쉽지 않다. 껍데기 한 조각 들어가는 꼴을 못 보는 성격이라 어쩌다 한번 사 오면 한 알씩 씻어내느라 목이며 허리가 부러질 듯 아프다. 그러다 보니 남자의 특별 주문이 없다면 거의 손이 가지 않는 식재료라서 어머님의 음식 중 제일 반갑다. 힘드실 텐데 하지 마시라고 말은 하지만, 좋아하는 걸 아시니 꼭 보내주시는 거다. 우리는 주로 통영에서 양식한, 급랭한 냉동 굴을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거나 국을 끓여 먹는데 생굴의 신선함과 고소한 감칠맛을 따라갈 순 없다.


  시어머님의 요리 솜씨는 젊어서부터 남자의 친구들이 다 인정했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전라도 여자치고 요리 솜씨 없는 사람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군산은 유독 맛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고장이다. 그런 군산 사람들도 인정한 솜씨였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남자가 가장 잘 쓰는 말이 “우리 엄마가 이거 진짜 잘하셨는데.”이다. 기껏 열심히 차려준 밥상 앞에서 그러니 가끔은 질투가 나기도 하지만, 나 또한 엄마 밥이 제일 맛있으니 인정하기로 한다.


  남자는 김밥만 보면 어머님의 김초밥이 생각난다고 한다. 소풍날 아침, 김밥을 쌀 때 밥이 쉬거나 상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식초를 넣으셨는데 목도 메이지 않고 맛이 좋아 인기 폭발이었다는 것이다. 어머님의 요리솜씨를 찬양하며 굴 생채를 먹다 보니 학창시절 솜씨 좋은 어머님들의 도시락이 인기를 끌던 생각이 난다.


  도시락을 먹던 우리 세대는 싫든 좋든 학교에서까지 어머니의 음식을 먹었다. 밥 위에 올린 달걀부침이나 소시지는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친구들 입속으로 사라졌고, 김밥이나 불고기는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멸치볶음이나 콩자반 같은 밑반찬조차 못 싸 오는 친구도 꽤 많았다. 매일 김치만 싸 오는 친구가 있으면 그 집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너스레를 떨며 각자 싸 온 반찬을 늘어놓고 친구들과 나눠 먹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어머니들은 친구들과 나눠먹으라며 밥과 반찬을 항상 넉넉히 싸 주셨다. 자식을 잘 먹이고 싶어도 먹일 것이 없어 안타까워했던 부모를 사회가 감싸 안는 시대였다. 풍족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너무 많이 가지지는 않은 행복한 시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학교 급식을 하고 모두가 똑같은 음식을 먹지만, 내 이웃의 아이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베풀던 공동체는 찾아보기 어렵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가난한 어머니의 김치를 먹었던 시대의 아이들보다 더 허기져 있는 것은 아닐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사회지도층의 무도함과 갈라치기 행태를 닮아가는 아이들. 인격이 아닌 아파트 이름으로 친구를 고르고, 예절이 아닌 차별로 서로를 대하며, 신뢰가 아닌 이익을 좇아 행동하는 사회구성원이 되도록 아이들을 방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음식 맛은 장맛’이라는데 요즘은 장을 담가 먹는 가정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집마다 입동에서 동지에 메주를 띄우고 정월 말일이면 장을 담가 먹던 민족이 대기업이 만든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똑같은 맛을 만든다. 자극적이고 달다. 장만큼은 아니지만 김치도 사 먹는 가정이 많아졌다. 아예 김치를 먹지 않는 아이들도 많고, 김치를 직접 담가 먹는 집은 열 가구 중 두 가구 정도라고 하니 이러다 조상의 지혜가 담긴 우리의 자랑스러운 김치가 점차 잊혀지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다.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 장이나 김치를 담가 먹으라는 말이 아니다. 식구도 적고 재료도 사철 구할 수 있다 보니 나조차도 김장은 하지 않는다. 위생적인 시설에서 생산자와 상생하며 좋은 품질의 맛있는 김치와 장, 젓갈이나 반찬을 만들어 파는 기업들도 많다. 이런 착한 기업들은 우리의 소비가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 그들이 우리의 전통 음식을 잘 만들어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응원하고 감독해야 한다.


  쓴소리 한마디 하자면, 두부나 콩나물, 밑반찬이나 김치 같은 음식은 대기업이 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해도 너무 한다.’ 싶을 정도로 돈 되는 건 다 한다. 똑같은 맛은 차치하고라도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생산자들은 대체 뭘 먹고 살라는 얘긴지…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가격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고 우리는 우리대로 선택권을 잃게 된다. 수고로운 노동으로 양질의 재료를 제공하는 생산자, 우리의 맛을 지키고 알리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영업자,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는 뜻있는 중소기업들의 무운을 빈다. 


  ‘어머니의 음식’이 그토록 맛있고 그리운 이유에는 장맛, 김치 맛, 공동체의 관심보다 더 큰 것이 있다. 바로 ‘정성(精誠), 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이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는 어머니의 음식은 생산에서 최종 소비에 이르기까지 음식의 기본은 시간과 정성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K-drama, K-pop 등 한류의 영향으로 한식을 원하는 외국인도 많아져 수출도 느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과 일본이 막대한 자본력과 인적 자원을 투입, 김치의 원조를 자처하며 사실을 왜곡해도 한국 김치의 맛을 따라올 수 없는 데는 기업의 분투와 함께 한식을 사랑하고 지켜온 대한민국 어머니들의 오랜 정성과 수고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도시락을 싸지 않고 장이나 김치를 담그지 않는 소위 MZ 세대 부모도 이유식부터 시작해 자식이 먹는 음식의 재배 환경과 성분, 조리법까지 심혈을 기울인다. 식재료가 바뀌고 식생활이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건 내 자식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려는 어머니의 성심(誠心)이다. 세대가 변한 게 아니라 시대가 변한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따스한 눈으로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어머님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굴 생채를 먹으며 당신의 건강을 기원해 본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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