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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에 내리는 눈 Jan 12. 2022

초급 불어

삶의 태도에 관하여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문지혁 작가의 소설 '초급 한국어'와 관련은 별로 없지만 그 소설로부터 촉발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초급 한국어' 소설은 네이버 오디오북 <듣는 연재소설> 코너에서 작가가 낭독한 것을 무료로 들을 수도 있는데 연재 클립 중에 '랜선 라이브 낭독회' 클립 [1]이 있다. 문지혁 작가, 이길보라 감독, 고요서사 차경희 대표가 소설에 대한 대담을 나누는 중에 스쳐 지나가듯이 '교과서'에는 바르고 정석적인 이야기, 착한 이야기만 나올 것이라는 걸 당연히 전제로 깔고 수다를 나누는 부분이 있었다. 왜 날씨가 좋지 않아도 교과서 예문들은 '날씨가 참 좋죠' 하는 식으로 밝고 긍정적인 것들만 있을까? 이런 의문을 품은 사회자의 지적에 대해 작가도 교과서에 '날씨 참 거지 같죠'라고 쓸 수 없는 걸 이해한다며 그렇게 너무 정형화된 이야기만 쓰다 보니 교과서에 나오는 '회화'들은 진짜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가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깊은 내면까지는 접근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것을 방구석에서 혼자 들으며 청개구리처럼 외쳤다.


 "프랑스에서는 아닌데?!"


 소르본 어학당에서 불어 기초반 A1 코스를 듣던 시절이다. 듣기 평가를 하는데 내 귀가 안 뚫려서 그런 건지, 내가 방금 뭘 들은 건지 알 수 없어서 인식 체계에 큰 혼란을 겪은 적이 있다. 듣기 본문의 상황은 한 여성이 취업 면접을 간 상황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은 대화이다.


면접관: 자, 마담,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고 있나요?

지원자: 음... 전화기 파는 회사죠. 맞죠?

면접관: 에에? 아니오, 우리는 컴퓨터 하드웨어를 파는 회사입니다.

지원자: 아? 응, 오케이... 뭐... 그렇군요.

면접관: 왜 우리 회사에서 일하려고 하시죠?

지원자: 지금 일이 없어서요. 그래서 일을 찾고 있어요.

면접관: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지원자: 비서요.

면접관: 그럼 이전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뭐였습니까?

지원자: 남편 때문이에요. 남편이 다른 여자랑 살겠다고 저를 떠났어요.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여자랑요. 상상이 되시죠? 직장 내에서! 그래서 제가 그만뒀죠.

면접관: 아... 우리 회사에 관한 다른 질문은 더 없나요?

지원자: 아뇨... 별로...

면접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초급 불어 교과서의 패기 있는 지원자

 이 본문은 한국에서 20여 년을 살아온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면접 상황에서 너무나 벗어나 있어서 '설마 내가 들은 이 내용이 맞아?'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본문에 나오는 지원자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자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취업 면접의 안티테제, 잡 마켓의 룰 브레이커, 취업 전쟁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가 지원하려는 회사가 뭐하는 회사인지도 모른 채 면접에 와서, 왜 이 회사여야 하는지 특별한 이유도 설명하지 못하고, 면접관의 설명에는 '네 (Oui)'가 아닌 구어 '응 (Ouis)'으로 대답해서 '아, 그러셔? 그러거나 말거나. 그러시겠지' 이렇게 들릴 수도 있어서 더욱 안 좋은 인상을 주는 데다가, 사생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마지막으로 면접관이 준 기회까지 차 버리면서 회사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장점을 어필하지 않은 채 면접을 그냥 끝내 버린 용자. 처음에는 황당한 본문이라고 생각했다. 프랑스에서 직업을 구하려는 외국인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려면 지원 동기나 자기소개에 자주 쓰이는 표현을 가르쳐 줘야 할 텐데 이렇게 예외적인 상황을 예문으로 들면 어쩌자는 것인지... 모름지기 교과서적인 대화란 다음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면접관: 자, 마담, 우리 회사가 어떤 회사인지는 알고 있나요?

지원자: 예, 그럼요, 알고 있다 마다요. 귀사 제품의 오랜 팬으로서 저는 언제나 귀사에서 일하는 것을 꿈꿔 왔습니다. 귀사에서 나온 벽돌 핸드폰과 고양이 궁둥이만 한 유선 마우스도 집에 전자제품을 모셔 놓는 신당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면접관: (흐뭇) 아, 그래요?  그래도 우리가 꼭 당신을 뽑아야만 하는 이유가 뭐죠?

지원자: 저는 지금 당장 직장이 없어서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꼭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정말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각오로 열심히 이 한 몸 바쳐 일하겠습니다. 아, 어차피 비정규직 쎄데데 CDD (contrat à durée déterminée) 자리라서 뼈 못 묻는다구요?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블라블라.


 그런데 지난 5년간의 프랑스 살이를 돌이켜 보면 저 위의 지원자와 같은 삶의 태도와 방식을 견지한 사람들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꽤 자주, 혹은 심지어 이게 표준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를 괴롭혔다. 무책임하고 무지하면서 자기 일에 태만한 관공서 직원들, 누군가와 끊임없이 바람이 나고 있는 동료의 배우자/파트너들 때문에 동료의 푸념을 들어주는 일, 모든 질문에 '응, 응 (ouis ouis)'으로 일관하며 거들떠도 보지 않는 서비스업 종사자들... 물정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런 프랑스에 대비하려면 기초반부터 단단히 준비시켜 줘야 할 게다. '초급 불어' 교과서는 현실을 반영한 획기적인 디알로그 (dialogue)를 통해 '교과서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우리 한국인들이 교과서 안에서라면 응당 날씨는 좋겠거니, 면접 가면 딴소리는 안 하겠거니, 영희랑 철수는 사이좋게 놀겠거니,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 이유는 그런 상황이 표준에 등극할 정도로 잦기 때문이 아닐까. 날씨가 거지 같아서 짜증 난다 해도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그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살 수 있나. 면접에서 고용주나 면접관들은 압박 면접의 탈을 쓰고 갖은 인격 모독을 할 수 있지만 아직 피고용인도 아닌 지원자는 을이 되어 '먹고살려고 여기까지 흘러 왔다'는 말을 삼킨 채 비굴하게 웃음 지어야 하지 않나. 아마도 현실에서 극심한 젠더갈등으로 서먹해진 영희들과 철수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의 교과서는 이상적인 상황에 자신을 꿰맞추고 개인의 생각 표현을 공적인 자리에서 자제하는 한국인들을 잘 반영한 결과물일지 모르겠다.


 초급 불어 교과서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항의하는 법'을 기초 단계에서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독어를 배워 보니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하는 법, 어딘가에 항의하는 문서 작성은 중급 단계인 B2에서 가르치던데 (실제로 내가 본 중급 독어 시험 TELC B2에서 화장품이 피부에 안 맞아 환불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어휘나 문법 난이도를 감안했을 때 중급 정도의 실력은 갖춰야 제대로 쓸 수 있는 게 맞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불어에서는 기초인 A1 단계부터 항의하는 문장을 가르친다. 그만큼 프랑스에서는 일이 제대로 안 돌아가 항의할 일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는 게 아닌가 싶다. 언어 실력이 부족해도, 외국인이라 해도, 남들이 너를 어떻게 규정지어도 부당한 대우를 참지 말아라. 이런 게 바로 프랑스혁명 정신인가, 싶은 대목이다. 타향살이를 오래 하다 보면 포기에 익숙해질 때가 있다. 어차피 말해 봤자 안 돼, 내 말을 못 알아들을 거야, 아니면 내가 잘 말해도 상대방은 못 알아듣는 척을 할 거야, 내가 불어만 (독어만) 잘했더라도... 이런 패배주의적인 생각에 빠질 때면 초급 불어 교과서의 당돌함을 떠올려 봐야겠다. 아베쎄 (ABC)만 겨우 뗐어도 뭔 상관? 따질 건 따져야지.


 삶이 흐리다. 젊은 날에는 궂어도 폭풍 같이 기세 좋더니 이제는 축축한 가랑비만 내린다. 여기저기 웅덩이가 움푹 패였는데 물 마르게 햇볕 쨍할 날은 요원하니 패인 곳은 연꽃으로 덮어야 할까. 한 살 더 먹었으니 이제는 눈치 보며 궂은 날씨에도 화창하게 웃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이렇게도 질러 보련다.


 "날씨가 참 거지 같죠?"


 



[1] [랜선 라이브 낭독회] 이방인으로 살기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712/clips/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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