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도 그럴 것이 대학 입학 후부터 직장생활을 하는 지금까지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들 중 하나가 어느 애니메이션 장화 신은 고양이 눈망울로 "술은 냄새만 맡아도 취해요"였으니 내숭이라고 재수 없다 말해도 할 말 없는 나지만 술의 냄새만 맡아도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피로를 풀어준다는 흔한 드링크제 한 병도 마시지 못하는 게 나의 팩트다.
나에게 술은 정말 피하고 싶은 원수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 나의 파격적인 주량 또한 맥주 세 모금. 여기서 말하는 세 모금이란 작은 종이컵으로 반잔이 채 안 되는 양이다. "난 늘 술이야 맨날 술이야."를 외치던 노래의 가사는 나에게 있어 대단함 파격 그 자체였다.
내가 술을 처음 맛보게 된 건 아주 어렸을 때.
제사를 지내려 작은 주전자에 부어놓은 청주를 어른들 바쁜 틈을 타 물인 줄 알고 마셨던 그 날. 목구멍이 타들어 갈 듯한 느낌과 알 수 없이 이상하기만 했던 그 맛. 맛을 채 느끼기도 전에 어린 나는 정신을 잃었으니 조상님 기일에 하마터면 건너선 안 될 강을 내가 건널 뻔했다며 아직까지도 조상님들 기일 때마다 말씀하시곤 한다.
성인이 된 후 술과 내가 다시 마주한 것은 대학 MT 때.
그 날 나는 파도타기라는 단어가 그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다들 태어날 때부터 술병 하나쯤은 손에 들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누구 하나 나처럼 "전 술을 못해서요." 이렇게 말했으면 거기에 묻혀 눈치껏 피해보기라도 했을 텐데 선배들 눈치를 보았던 건지 정말 나같이 말도 안 되는 주량을 가진 이가 없었던 탓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나의 물오른 발연기로 어렵게 상황을 모면하긴 했지만 바닥을 드러내며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빈 잔을 볼 때마다 나에겐 파도타기가 아닌 쓰나미 같은 공포가 밀려왔었다.
몇 해 전 12월 마지막 날.
저녁 식사 후 가족들끼리 조촐하고 오붓한 망년회를 하자며 둘러앉았다. 그리고 가족 앞에 놓인 술병은 맥주 한 병이 전부.
그날 난 취약한 나의 주량이 엄마에게로부터 내려온 유전자였음을 알게 되었다.
맥주 세 모금을 마시고 얼마 후 애국자도 그런 애국자가 없다고 밤새 애국가를 목놓아 부르다 주무신 엄마와 곁에서 노래에 맞춰 지휘를 하다 박수를 치다를 반복하며 잠들었다는 나를 보며 할 말을 잃은 나머지 가족들은 조용히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고.
다음 날 아침 그 정신에 거실에 슬리퍼도 신발이라고 신발장에 모조리 넣어 가지런히 정리해 둔 날 보며 내 인생에 술은 없다를 다시 한번 확인 다짐했었다.
어느 날 지인들끼리 모임이 있었다. 가까운 분과 처음 만난 분들이 함께 섞인 자리. 이야기가 오고 간 얼마 후 술은 못한다며 정중히 거절하는 나에게 얼큰하게 술에 취한 누군가 "분위기 흐리고 있어." "술 한잔도 못하면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며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은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술을 못하는 게 분위기를 흐리는 건가? 언제부터 우리 사회가 이렇게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된 건가?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술을 즐기면 되는 거고 술은 잘 못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좋아하는 난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이렇게나 잘 어울릴 수 있는데.
시간이 흐르고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내뱉은 이가 술에 잔뜩 취해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네발과 두 발을 교차해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을 보고 난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난 그날 술이 과하면 인간도 동물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누군가 나에게 술을 권할 때마다 "술을 잘 못해서요"라는 말 앞뒤에 항상 "죄송해요"하는 말을 붙여 사용했었다. 술을 못하는 게 죄송할 일은 아닌데도 습관처럼 죄송해요라는 말을 하는 나를 보면서 문득 그게 왜 죄송할 일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을 마시려 성인이 된 것도 아니고 술 한잔 제대로 못한다고 해서 사회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술이 없어도 난 누구보다 그 분위기를 즐길 줄 알며 술 없이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 열창이 가능한 흥부 자이며 술이 없어도 십 년 넘게 그런대로 원만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술을 못 마시는 건 더 이상 죄송할 일이 아니라 난 그저 술을 즐기지 않는 것뿐, 술을 즐기는 사람들과 그저 다른 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