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어떻게 치유되는가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아스라이 하얀 빛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하나둘 추억이 떠오르면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 윤하, (2022), 사건의 지평선, END THEORY : Final Edition
올해 봄, 나를 괴롭혀온 개인적인 기억이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지나가길 바라며 반복해서 '사건의 지평선'을 들었습니다. 노래는 역주행해 다시 귀에 닿기 시작했고, 느꼈던 생각을 풀어내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질량에 비례해 중력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력은 물질을 끌어당기지요.(정확히는 시공간의 곡률이지만) 그래서 지구는 우리 모두를 땅에 서 있을 수 있도록 붙잡고 있습니다. 달의 질량은 지구에 비해 1/80 정도이며, 그래서 달의 중력은 지구보다 1/4 적습니다. 달에선 몸무게가 1/4로 줄어드는 것이지요.
반면 태양은 어떨까요. 태양의 질량은 지구보다 33만 배 더 크며, 그 놀라운 중력으로 태양은 태양계의 모든 천체(행성, 유성 등)를 자신의 영향 아래에 묶어 두고 있습니다. 태양이 실제로 미치는 영향력은 더 방대하나 해왕성까지의 거리만을 반지름으로 생각한다면, 태양은 자신을 중심으로 약 49억km 반경의 모든 천체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것이지요.
질량이 더 거대해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태양과 같이 질량이 매우 큰 항성은 내부 핵융합으로 인한 밖으로 밀어내는 힘과 강한 중력의 안으로 당기는 힘이 균형을 이루어 내부로 붕괴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부의 핵융합이 언젠가 에너지를 소비하여 멈추게 되고, 그리고 질량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매우 높은 상태로 유지된다면(약 태양의 20~30배) 균형은 무너지고, 천체는 스스로의 강한 중력으로 인해 끊임 없이 중심으로 무한히 수축하게 됩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빛조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천체, 블랙홀(black holl)이 되는 것이지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은 블랙홀의 경계, 빛조차도 탈출 할 수 없는 지점을 의미합니다. 사건의 지평선 안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하더라도 사건의 지평선 밖으로는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빛을 포함한 어떤 정보도 외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가수 윤하는 '사건의 지평선'의 개념을 활용하여 가사를 쓰셨고, 저는 내게 아픔을 주었던 기억들이 더이상 내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는 지점,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지나가길 바라며 노래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트라우마를 겪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도 발생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처럼 아픔을 마주하며 함께 경험하기도 했지요. 2014년 밀려드는 슬픔으로 인해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고, 이태원 참사 이후 출퇴근 지하철에 밀려드는 군중을 보며 두려움을 느낀 건 비단 저 뿐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트라우마란 무엇일까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 통칭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말하는 PTSD는 사람이 전쟁, 자연재해, 사고, 재난 등의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이후에도 반복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이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 생활 유지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우리의 뇌에선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브로카 영역은 말하기를 담당하는 뇌 영역 중 하나로, 뇌졸중 환자들은 이 부위에 혈액 공급이 차단되어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브로카 영역이 기능을 하지 못하면 생각과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 연구에서 뇌 스캔 결과 기억이 재현될 때마다 브로카 영역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트라우마는 뇌졸중과 같은 신체 질병으로 발생하는 결과와 크게 다르지 않고, 심지어 몇 가지는 동일한 결과를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시각적 증거로 확인된 것이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제효영 옮김, 을유문화사, 93쪽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의 뇌는 문자 그대로 '얼어붙게' 됩니다. 언어를 관장하는 뇌의 영역인 '브로카 영역(Broca's area)에 혈액 공급이 줄어들고, 언어 기능이 크게 감소합니다. 이로 인해 극심한 외상을 경험한 사람들은 실어증을 경험하거나 주위와 소통을 어려워하기도 하죠. 이처럼 고통을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아픔을 공유하는 일은 뇌과학적인 측면에서도 쉽지 않은 일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복의 중요한 부분은, 브로카 영역을 다시금 활성화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트라우마 경험에 대해 감정을 담아 충분히 '이야기' 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하지요. 트라우마를 경험한 개인이 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이를 스스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 안전한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지요. 하지만 주변 환경이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한다면, 트라우마를 경험한 개인은 끝없이 고립되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아프게 하는 기억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 지점, 사건의 지평선을 넘어서기 위해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트라우마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생존자에게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해주고 그 고통을 비하하는 사람들에 맞서 함께 싸워주는 이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생존자의 몸속에서 고통의 에너지로 머물던 사건은 언어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 김승섭,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난다, 259쪽
우리가 나의 아픔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너그러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당신의 시간을 기다리며 함께 아픔의 시기를 지나가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조심스럽고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천천히,
천천히 진행하세요.
아직 오래되고 깊은 상처들이 딱지도 아물지 않았는데 얼마나 새살이 돋았는지 궁금한 나머지 조급하게 떼어내고 또 떼어내면서, '나아지고 있는 거야? 왜 지금 웃고 있어? 이대로도 괜찮아?' 하며 타인과 자신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세요. 몇 년을 두고, 차츰 자신을 받아드려 주세요.
◆ 허지원,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김영사, 243쪽
어디선가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려 하는 트라우마와 씨름하고 있는 이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본다면 (제가 그럴 주제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말을 건냅니다.
"괜찮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한 우리들이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넉넉한 마음을 갖기를, 당신의 죄책감과 슬픔이 조금은 덜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