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부터 좀 가볍게 살아보려는 이야기
나는 짐이 많다.
정확히 말하자면, ‘혹시 모르니까’라는 마음으로 챙기는 짐이 70% 이상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학교 갈 때면 거북이 등껍질처럼 커다란 가방을 메고, 그걸로도 모자라 에코백까지 들었다. 그 시절 나는 지금보다 몸집이 작았는데, 그 큰 짐을 메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교장 선생님께서 “가방에 잡아먹히겠다”고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실 나는 가벼운 가방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 미니백을 어깨에 살짝 걸치고 두손 다 가볍게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건가 싶겠지만, 나에게는 쉽지 않은 미션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작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 미래 모습만 상상하면서 정작 어제도 출근할때 에코백 하나랑 쇼핑백 하나 이렇게 두개를 들고 갔다... 흔히 mbti로 말하면 슈퍼 J인간인 나한테 이런 성향을 한번에 고치는건 쉽지는 않았다. 그러던 와중, '미니템'으로 대체해서 가방에 들어가는 물건의 종류는 그대로인데, 각각의 크기만 줄여서 좀더 가볍게 들고다닐 수 있는 '보부상 꿀템' 콘텐츠를 보게 됐다. 이거다 싶어서 신기한 미니템들을 사 모았는데, 결국에는 물건의 크기만 줄어들었지, 개수는 별로 줄어들지 않아서 정말 작은 가방은 아직도 힘들겠더라.. ㅎㅎ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고 싶지 않다. 미래의 나를 위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두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다 보니 항상 이런다. 오늘은 안 챙겨도 될까? 고민하다 결국 “혹시 모르니까”를 외치며 다시 가방에 넣는다. 그렇게 짐은 또 늘어난다.
나는 '슈퍼J인간'으로서 계획을 세우고, 정리하고, 상황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걸 좋아한다. 어느 날 MBTI에 대해 보다 ‘J’와 ‘P’의 진짜 의미가 Judgement와 Perception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J는 판단하고, P는 인식한다. J는 상황을 보면 ‘판단’을 내리고, P는 그 상황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게 왜 '계획세우는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계획없이 즉흥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는지를 찾아봤더니 참 흥미로웠다. J인 사람은, 어떤 사건을 보면 거기에 자신의 '판단'을 가미한 결론을 내린다. 그래서 A와 B가 싸운 상황을 전해 들었을때, J성향이 강한 사람은 'A가 잘못했네'라는 식으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근데, P 성향이 강한 사람은 그 상황 자체를 '인식'하는데에 좀 더 초점을 둔다고 한다. 그래서 'A와 B가 싸웠구나'에서 멈추고, 그것에서 더 나아간 개인적인 의견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래서 P인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이나 돌발상황이 주어졌을때, 본인이 그 상황에 대해서 판단하기 보다는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성향이 좀 더 강하기 때문에, 즉흥적인 상황에서도 '스트레스 받지 않고' 유연하게 잘 대처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J인 상황은 각 상황에 대한 '판단'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워두는데, 새로운 상황이 펼쳐지고, 기존의 계획과 맞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의 판단을 기반으로 세운 계획이 흐트러진거니까 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J의 세계에서 오래 살아왔다. 계획표를 짜고, 리스트를 만들고, 할 일을 미리미리 정리한다. 주말에 본가에 갈 일이 있으면 전날 밤에 ‘짐 리스트’를 써두고, 아침엔 대중교통 앱으로 미리 여러 옵션의 경로를 고려해본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건, 이 과정에서 진심으로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계획을 세운다는 건 나에게 일종의 ‘자기 돌봄’이다. 미래의 내가 고생하지 않게, 오늘 내가 애써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방식이 항상 나를 편하게 해주는 건 아니다. 짐이 너무 무거워서 외출이 버겁고, 두 손이 쇼핑백과 에코백으로 가득 차면, 나도 문득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조금 가볍게 살 수는 없을까?”
나는 유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계획이 틀어져도 “뭐 어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재치 있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가벼운 가방 하나 메고 산책 나갈 수 있는 사람.
그건 단순히 ‘짐을 덜자’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혹시 모르니까’라는 마음을, ‘그때가서 생각하지 뭐’라는 마음으로 천천히 바꿔보려는 노력이다.
짐이 무거우면 멀리 가기 어렵다. 이건 실제 물리적으로 길을 걸어나가는 데에 있어서도 팩트이고,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따금 미처 챙기지 못한 무언가 때문에 조금 불편해질지라도,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힘이 자라나기를 바란다.
올해는 꼭, 미니백으로 외출하는 날을 늘리고 싶다. 물건도 줄이고, 마음도 덜고. 그렇게 가볍고 기분 좋은 하루들을 하나씩 늘려가고 싶다. 내가 더 멀리, 더 오래 걸어가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