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은 내가 아니다

나에 대한 주도권 잃지 않기

by 벼리언니

나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다.

생각도 많고, 마음도 여려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툭 하고 꺾일 때가 많다.

수도권에서 지하철로 통학, 통근해온 인생이라 그런지, 매일 아침 그 작은 칸 안에서 다양한 기분들을 느끼곤 한다. 비 오는 날, 습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지하철에 서 있다 보면, 앞자리 사람이 내릴 듯 말 듯한 모션만 반복할 때 괜히 짜증이 솟구친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되지?’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저 깊은 바닥까지 내려간다. 그런데 또 지하철에서 탈출해서 비가 그치고 하늘에 구름이 예쁘게 퍼져 있으면 그새 기분이 풀려버린다. 그렇게 내 하루는 오르락내리락, 감정 곡선을 따라 흘러간다.


예전엔 그게 너무 힘들었다. 기분이 안 좋으면 하루 자체가 무너지고, 일상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기분이라는 게 결국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일 뿐인데, 그것이 나의 하루를 통째로 흔든다는 게 참 억울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는 그 기분을 애써 숨기려고도 해봤다. 그런데 그게 더 피곤하더라. 겉으론 멀쩡한 척하면서 속으론 엉망이 되어 있는 나를 붙잡고 있는 게 더 지치는 일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만의 방식이 조금씩 생겼다.
우선, ‘기분은 내가 아니다’라는 말이 정말 와닿았다. 기분은 마치 구름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나는 그 아래에 계속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 순간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괴로워도, 한두 시간 정도만 바람을 쐬거나, 잠깐 누워 있거나, 웃긴 영상을 하나 보면 확실히 나아진다.


나는 내 기분을 돌보는 여러 방법을 만든다. 기분이 나빠졌을 때는 아예 내가 좋아하는 예능을 켜버리거나,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는다. 어떤 날은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어떤 날은 최대한 뽀송한 이불을 덮고 잔다. 그랬더니 기분은 결국 지나간다는 걸 몸이 먼저 기억하더라. 나를 조금 달래주는 루틴이 생기니까 감정에 완전히 끌려가지 않게 됐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건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나쁘다고 해서 “오늘 회사 안 가요”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감정에 집중하는 대신 일에 집중하는 그 몇 시간이 오히려 감정을 잠시 내려놓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 순간의 나를 구해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감정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시스템’이었다.


그렇게 기분과 나 사이에 경계를 하나 세우기 시작했다.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는, 그냥 이렇게 생각한다.
“아, 난 지금 ~~때문에 기분이 안 좋구나.”

나에 대한 객관성과 중심을 잃지 않는게 중요한 것이다.
그다음엔 그 기분을 조금 낫게 만들기 위해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걸 해본다.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거나, 향 좋은 바디로션을 바르고, 무드등을 켠다. 유튜브 브이로그를 틀어놓고 그냥 ‘아무것도 안 하기’를 해본다. 그러면 꽤 많은 경우에, 감정의 강도는 절반 이하로 줄어든다.


물론 여전히 나는 감정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두지는 않는다. 그건 훈련의 결과였다. 내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작은 기술.

인생은 계속 앞으로만 흘러가니까, 지금이 내 인생에서 '제일 늙은(?)' 시점이다. 그래서 '아니 내가 1n년이나 살았는데', '아니 내가 이십몇년이나 이 성격으로 살아왔는데' 이 성격을 어떻게 고쳐? 라는 막막한 마음이 들더라. 근데, 생각보다 된다. 그 시간들이 절대적인 시간으로 따지면 긴 시간인데,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또 짧은 기간이라, 우린 끝없이 배우고 성장하고, 성숙해지더라. 생각보다 감정은 바뀌고, 감정의 흐름을 인식하는 내 자세가 바뀌니까, 삶의 결도 바뀌더라.


세상이 바뀌기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 바뀌길 기다리는건 너무 나에게 손해인것 같았다. 그러면, 내 마음을 바꿔보는게 훨씬 더 효율적이고 쉽다는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이 세상에 어떤 마음이 정답인건 없으니까, 내가 내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게 아니다. 오히려 더 좋아질 수 있다. 나는 내 안에 굳어진 어떠한 사고방식과 마음의 흐름을 바꾸면 뭔가 자꾸 큰일이 날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좀 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고민해보면, 그 걱정이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던 적이 훨씬 많고, 긍정적으로 사고만 바꾸면 오히려 더 성과가 좋았다. 그래서 그럴 바엔, 내 마음을 어떻게 다르게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고, 그 중에 하나 자연스럽게 깨달은게 기분과 나를 분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내 기분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내가 그것을 다룰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다.
내 인생에서 나의 주도권을 계속 쥐고 가는 사람이 정말 건강한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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