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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룩쥔장 Sep 19. 2022

1. 필리핀행

브런치북_다시, 제주 

"선생님, 저희 필리핀으로 이사하게 됐어요."

"네. 자녀분을 통해 얘기 들었습니다. 좋은 곳으로 가신다니 부럽습니다."

"처음에는 딸아이가 안 가겠다 했는데 새로 얻은 집에 수영장이 있단 소리에 넘어간거 같아요. 이제는 아이도 몹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역시 물놀이죠. 집에 풀장이 있다니 저희 집 아이들도 데리고 가고 싶네요."

"방학때 동남아 많이 가신다고 들었어요. 필리핀 오시면 연락주세요. 언제든 환영합니다."

이제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작은 아이는 곧 이 한국땅을 떠나 필리핀 앙헬레스로 떠나려 합니다.  


둘째 아이가 일곱살이 되었을 때, 우리는 2년 동안 살던 제주살이를 정리하고 육지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남편이 사업을 이유로 제주로 내려가 아이가 아빠와 떨어져 지내기를 몇년째, '가족의 의미'를 다시한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저는 큰 아이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제주행을 강행했습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한창 민감한 사춘기에 들어선 중2, 세상 누구보다 무섭다는 그런 중2를 데리고 제주행을 감행한 저도 참 모진 엄마였다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고 낯선 제주가 싫어 가지 않겠다는 아이를 우격다짐으로 전학시키고 배에 태웠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부모의 결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강제로 전학을 하게 된 큰아이는 제주에 도착한 이후 두달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로지 핸드폰만 손에 쥔채 밤낮으로 육지의 친구들과 교신만 했습니다. 제주에 도착한 때가 1월의 중반, 한겨울에 집도 몇채 없던 중산간 한적한 시골동네였기에 그 고립감과 고통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한달 후 방학이 끝나고 시내로 다시 이사하여 새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면서 큰아이는 그제서야 침묵을 해제하고 다시 예전의 밝은 아이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고입을 앞두게 되자 다시 큰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등학교는 육지로 가야겠다는 아이의 고집을 도통 꺽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강한 확신과 다짐에 가득찬 아이의 뜻에 따라 결국 우리 가족은 살던 집과 오픈한지 1년되어 막 자리잡기 시작한 식당을 처분하고 모두 함께 예전에 살던 곳으로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고 이제 또다른 모험을 찾아 필리핀으로 떠나려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공항은 무척이나 분주했습니다. 

커다란 이민가방을 두개나 부치고도 노트북 가방과 기내용 가방, 두툼한 겨울 파카가 가득 든 수레를 밀며 게이트를 향해 작은아이의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대학 입학 통지를 받고 곧 졸업을 앞둔 고3 큰아이는 결국 한국에 혼자 남기로 했고, 남편은 이미 몇달 전에 사업을 이유로 필리핀에 먼저 들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 혼자 남을 큰아이가 맘에 걸렸지만, 어찌보면 사십을 훌쩍 넘은 우리에겐 마지막 해외진출의 기회가 될것 같아 저는 주저하는 마음을 다잡듯 작은 아이의 손을 더욱 꽉 쥐었습니다. 


비행기 창밖으로 어둠에 잠긴 도시의 불빛이 보였습니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2시 30분을 향해 가고 있었고 몹시도 피곤했던 하루가 다시 피곤하게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클락 공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들리고 저는 옆에서 깊이 잠든 작은 아이를 깨웠습니다. 핸드폰을 켜자 연이어 문자 알람이 이어졌습니다. 외국여행을 위한 안내사항, 주의해야 할 전염병 등에 관한 안내 문자들 속엔 남편으로부터 온 카톡도 있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으니 수속 잘하고 나오라는 톡이었습니다. 단지 몇 시간이었지만 낯선 이국땅에서 내 가족이 기다리고 있다는 안도감에 적잖이 마음이 놓였습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두꺼운 겨울잠바를 양팔 가득 벗어들고 아이 손을 잡은채 이민가방을 끌며 검색대를 통과했습니다. 저만치서 초조한 얼굴로 손을 흔드는 남자가 보였습니다.


순간 저는 그를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분명 제가 알던 남편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맞는데 실상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은 너무나 야위어 있었습니다. 뼈가 앙상한 채 얼굴엔 수심이 가득했고 애써 웃고 있었지만 두 눈은 겁에 질린듯 불안해보였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던 그 당차고 자신감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공항에서 나오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이어 저의 손을 잡으며 먼길 오느냐 고생했다 말하는 남편은 없는 기운에도 애써 힘을 내려는 말기암 환자 같았습니다. 짐을 건네받고 앞장서서 주차장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딸아이만 옆에 없었다면 주저앉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한밤중 적막한 시내를 가로질러 차를 타고 도착한 타운 하우스 입구에는 총을 든 가드가 서 있었습니다. 

그 집은 이미 두달 전에 제가 와서 남편과 함께 계약했던 한국인 타운하우스였습니다. 시내의 필리핀 현지인 집들과는 달리 깔끔하고 안전해 보이는 곳이었기에 하루만에 렌트 계약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몇번이나 머릿 속으로 집구조를 그려가며 가구배치를 고민했던 집이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 보낸 짐이 도착하지 않아 집 안은 휑했지만, 다행히 마닐라로 먼저 떠난 집 주인은 작은방에 더블침대 하나를 두고 갔습니다. 이층에 있는 그 침대에 셋이 눕자 피곤했던 아이는 금새 쌔근쌔근 잠이 들었고 저와 남편은 잠이 오지 않아 두런두런 어둠 속에서 한참동안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미 한국에서 남편을 통해 필리핀 현지 상황을 전해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사이 남편 혼자 겪었던 일들은 놀라울만큼 절망적이었습니다.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속에 어느새 창밖으로 닭 우는 소리와 함께 먼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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