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무도회
총성이 울리고, 서막이 열린다.
줄을 지어 이동하는 사람들의 얼굴로 희망과 그늘이 번갈아 드리운다. 걸친 외투와 질끈 댕겨 묶은 머리는 발품을 팔아 얻은 희망의 값이 될 것이다. 짝을 맞춰 진행하라. 닮은 이의 낯빛은 곧 출구가 될지어니. 부끄러움을 내던지고 손을 높이 치켜드니, 목청높여 더 높이 소리치라. 오늘의 역경이 비로소 내일의 영광이 되리라.
기회는 내려졌다. 모든 더러움에게로의 단죄를 내릴 단 한 번의 기회. 뭍으로 몸을 치장하고는 통렬한 저항을 시작한다. 치렁이는 머리를 치맛단처럼 말아 이리저리 뒤적이고는 새빨갛게 물들인 입술을 따라, 처음 내딛는 발걸음은 자유로워라. 조신히 내딛던 한 걸음 두려움을 떨쳐버리고는 견고하게 쌓인 벽을 부수자. 서광의 빛이 더 멀리 닿을 때까지.
곱게 다린 얼굴로 분개를 마주한다. 철모르는 분개가 낯가죽 두터운 본질을 포장한다. 삭아내는 것은 답이 아니오, 막힌 길을 에둘러도 같은 길이니 싸우지 않으면 영영 닿지 못할 상봉은 운다고 해결되지 않소. 그러지 않으면 가족에게 짐을 덜고 친구로부터 품값을 받아 평생을 연명할 터이니 세치혀는 누가 고쳐준단 말이오? 허름한 내 마음을 팔아서라도 안녕과 평화를 기어이 사들일 수 있다면.
그 무렵의 행렬은 기이할 정도로 질서 정연했다. 폭력은 온통 소외된 자들의 몫이었다. 세상은 보이는 것들을 편들었고, 보이지 않는 것에는 이름 없는 것들의 지분을 두기 바빴다. 이름 없는 것들은 다시 둘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진짜요, 나머지는 가짜였다. 가짜란 것에도 급이 있다면 진짜란 것의 값어치는 가짜란 것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좋을만큼 진짜란 것의 지분이 그랬다.
날씨에 걸맞는 허름한 셔츠를 입고 나서면 주변을 에워싸는 차갑고 서늘한 공기 아래 하루는 죽었소, 이틀은 아팠소, 오늘은 귀신이요, 내일이면 꽃이 피리.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의 향연은 끝없는 갈구의 몸짓이자 속죄였다. 행렬은 밤이고 낮이고 끊임없이 지속되었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자 세간에서는 더러운 것이라고 천시했다.
억세고 가벼운 춤. 속 모를 뒤를 가진 춤.
이름도 없는 아무개의 춤. 춤.
그럼에도 처녀들을 위한 춤은 계속 됐다. 사랑을 위한 투쟁은 혁명의 날개를 부수고 방향을 잃어버린 개혁의 탈은 매번 실망만을 안겼다. 전의는 무분별한 폭력 앞에 무너졌고, 용기란 1회용 패치처럼 가벼운 것으로 전락했다.
그들은 전사가 패전할 때까지 숨죽이며 복장을 갖추고, 예의를 갖춘 스텝을 밟았다. 전리품과 같은 전사의 복장은 유행처럼 많은이들의 귀감이 되었다. 구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것을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막힌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손에 전해진 전리품을 고스란히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 그동안은 이상하리만큼 하수구의 썩은 내가 진동을 했지만, 그마한 고역은 전장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견딜만한 고통이었다.
걸음은 더러 더디고, 빨랐다. 일정 기간 처녀들의 춤이 시작되면 모두가 숨을 죽이고 처녀들을 따랐다. 나는 모든 것이 낯설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의상도 갖추어지지 않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몰골로 행렬의 한 가운데서 본 적 없는 것들에 간혹 분개하는 것이 전부였다. 실로 투쟁이란 것도 몰랐다. 새빨간 입술도, 어쩌다 스치는 부끄러운 몸짓도, 패치를 얻은 자들의 기이함도 영영 닿지 않는 신기루를 바라보듯 한 자리에서 영문을 모른채 사랑의 타령이 끝나길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춤은 어느새 하나의 몸짓으로 통일되었고, 가락 하나 존재하지 않던 거리는 흥으로 가득찼다. 옷은 가벼워지고, 승전자만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거리를 누볐다. 전사의 전리품은 쓸모를 다한 듯 거리를 나뒹굴었다. 높이 치켜든 다리는 행렬을 따라 어느새 제자리를 찾았고, 투쟁은 그렇게 제 몸으로 버틴자의 패배로 남았다.
나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 자아내는 풍토는 입밖으로 내서는 아니되는 것이라 했다. 내고 싶지 않은 것들 이었다. 내고 싶지 않았다. 춤이 흥겨워질수록 밤은 조잡했다. 그들의 언어는 천시받는 것이었지만 무엇보다 간결했다. 간결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온갖 욕설이 뒤섞인 긴 원망만이 채워졌다. 문밖으로 한 걸음만 나서면 사라지는 것들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고요히 지나가길 기도하며 지켜야 할 것들을 떠올렸다. 그렇게 세간의 모든 속설이 지나가도록 감은 눈으로 버틴다.
그런데도 자꾸 말을 걸어왔다. 산에서, 뭍에서, 볕에서, 못에서 쉬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원망도 속죄도 없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오색찬란한 유혹은 또 다른 춤이라고 했다. 치맛자락을 움켜쥔 적도 없이 상대를 쓰러뜨리는 기술이야말로 들어본 적도 없는 허상이 아니었던가. 나는 손사레를 치면서도, 호기심을 영 이겨내지 못하고 은연중에 내내 그들을 뒤따랐다.
전에 없던 두터운 치마를 두르고, 정갈한 테이블 사이를 누비며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언젠가의 광대처럼. 먹지 않고 채우는 법을 배웠고, 취해서야 달리는 법을 배웠다. 생전 처음 밟는 스텝은 엉키고 설켜 영 엉성한 모양새를 띄운다. 자태 하나 흘리지 않고 사람을 끌어들이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뭍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나 좀 한번 보아주소 값을 흥정하듯 치마를 움켜 쥐고는 더러 다리를 높게 치켜 올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대 한 가운데로 뛰어들어 한 박자 늦은 열정은 부끄러움이 없다.
저항에도 정해진 방법이 있소?
행렬이 붕괴되자 사람들은 야유하기 시작했고, 전의를 잃은 패자들과 개혁에 실패한 병사들은 일부 환호했다. 춤은 단숨에 인기를 끌었다. 갑옷이 두터워질수록 전장은 고요해졌고, 막사만이 그 슬픔과 분개를 아는 듯 홀로 흐느꼈다. 품삯으로 나오던 1회성 용기는 돌고 돌아, 예우를 갖춘 복장의 행태를 갖추었다.
패배의 신호였다.
움켜진 치맛자락의 모양새가 닮아갔지만, 이번에는 동냥처럼 웃음이 던져졌다. 새빨간 입술로 내뱉던 날카로운 파편과 분개가 뒤섞여 거리를 활보한다. 춤은 더욱 격렬해졌다. 이제 누구의 것인지 알기 어려울만큼 난해해진 잊혀진 전장의 잔해를 마주하며 다리를 높이 치켜든다.
사그라든 젊음과 청춘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