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정상의 기준에 대해 짧막한 글을 적어낸 적이 있다.
딱히 글을 보는 존재, 즉 독자를 규정하기 어려웠지만 한 가지, 이 사회를 살아내는 정상인들이 꽤나 비정상인의 인권에 관심이 있다는 설명하기 난해한 저항을 인지할 수 있었다. 글을 적어내고 우리 사회가 상상 이상으로 정상이라는 단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개중에는 상대를 막론하고 정상의 기준에 대해 열거하라는 수준 이하의 노골적인 비난도 섞여 있었다. 물론 방문자 수가 일정하게 낮은 수치를 기록하고 있어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라고 단정지어 확신하기 어려웠다.
정상의 기준이란 무엇인가.
쉬운 예를 적어 본다. 내가 사는 주거지에는 하루가 멀다하고 정체 불명의 각종 소음들이 난무한다. 이 소음이란 것에 나는 꼬박 다섯 해를 넘기면서도 그 정체에 대해 명쾌하게 규정하기 어렵다. 다만 이 불규칙한 운율이 필요 이상의 불필요한 소음과 과잉 반응이란 것은 확신한다. dB로 측정해도 역시 국가에서 규정한 기준치를 훌쩍 초과한다. 그렇다면 나는 묻는다. 이러한 소음 속에서 정상인들이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과연 무엇인가.
오늘 나는 재활용품을 버리러 쓰레기장을 향하다 7대 정도를 맞았다.
그들이 논하는 정상의 기준을 들먹이자면 성인 여성이 7대를 맞았다는 사실은 비정상이다. 게다가 7대를 맞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항을 일으킬 만한 사건에 가깝다. 이러한 과정은 설명하는 것이 몹시 귀찮지만 누군가 나에게 실제로 맞은 적이 있냐고 항변한다면 나는 가볍게 목례를 전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방금 맞은 한 대가 까일지도 모른다.
묻는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건을 앞에 두고 정상인이 갈구하는 난해한 저항이란 무엇인가.
그러나 이러한 물음에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은 글을 쓰는 입장에서 볼 때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임에도 소위 화이트 칼라들은 쉬이 질문을 떨쳐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예를 들면 그렇다. 최근 도쿄 전력은 지난 달 24일 후쿠시마 제1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시작했다. 중국은 이에 반발해 해양 방류 직후 일본산 수산물 전면 수입 금지를 발표했다. 일본은 금수 조치를 철폐하라고 요구했으나, 중국은 지난달 31일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중단했다고 통보하며 맞서고 있다. 이러한 수선에도 나는 국내에 수입된 일본산 수산물의 구매 필요성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해야하는 일은 아니다.
사실 정상의 기준은 거기서부터 결정된다.
정상인들은 이러한 사정을 알고도 수산물을 구매할 것인가.
그렇다면 구매하지 않는 이는 비정상인가.
나는 이러한 질문을 갈구할 때면 부사 반드시를 앞에 두고는 한다.
'반드시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고나면 세상은 훨씬 정상의 사회에 가까워 진다.
그리고 이러한 아슬한 줄타기를 잘 타는 것을 두고 사회는 '화이트 칼라'가 아닌 성인이라는 고결한 명사를 부여한다.
이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