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담 Aug 25. 2021

김밥나라 김.떡.순.

남편이 오늘 저녁으로 뭐 먹고 싶은 것 있는지 물어보면 나는 안될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김밥나라 김떡순!'을 외친다. 뭐 물론 미국에서도 분식을 즐길 수는 있다. 한 줄에 만원 가까이하는 야채 김밥 ($7.99), 떡볶이 ($12.99) 그리고 라면($8.99)을 주문할 수 있는 식당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가끔은 꿩 대신 닭이라고, 일식집에서 파는 롤 세트와 우동을 대신 먹기도 한다.


맛있다는 곳에서 배달도 시켜보고, 열심히 레시피를 연구해서 만들어봐도 이상하게 김밥 나라에서 먹던 그 맛은 나지 않는다. 달짝지근한 떡볶이 국물에 찍어먹는 김밥과 순대, 밍밍한 된장국 그리고 함께 곁들여 먹는 단무지와 김치가 이토록 그리울 줄이야. 한국에 있을 때 더 많이 먹고 오지 못한 것이 오늘도 후회된다.


고삼 수험생을 거쳐 재수를 하고, 또 취업 준비를 하던 때에는 알루미늄 포일에 한 줄씩 투박하게 둘둘 말아 포장된 김밥으로 종종 아침밥을 대신하곤 했다. 돈도 시간도 부족했지만 꿈이 있어서 가난하지 않았던 시절, 김밥 나라 덕분에 밤낮 가리지 않고 부담 없이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1000원짜리 야채 김밥을 시작으로, 오천 원을 넘지 않는 메뉴들이 다닥다닥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메뉴판이 있어 든든했다.


된장국을 한 손으로 후루룩 들이키며 모의고사, 공채, 자소서와 남자 친구 이야기를 재잘재잘 나누다 보면  커다란 접시에 김밥, 떡볶이, 쫄면과 돈가스가 담긴 김밥나라 스페셜 세트와 제육덮밥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국이 나온다. 우리 동네 김밥나라에서는 만 이천 원으로 세 명이 배가 찢어지도록 먹고도 바지 단추를 풀어헤쳐야 겨우 숨 쉴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누군가에게는 그냥 흔하고 평범한 맛일 수도 있다. 어쩌면 맛보다도 열심히 도전하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았고 그래서 행복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직장에서 일에 치이고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절이 눈 깜짝할 새에 바뀐다. 나이 앞자리 수가 바뀌고 서른이 넘어서야 어릴 때는 듣기 싫었던 '그때가 제일 좋을 때'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한 가지 일에 몰입하고 집중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열정이 폭삭 가라앉고 이미 바닥을 드러낸 나의 에너지와 의지의 땅은 이제 비쩍 말라 여기저기 갈라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럴까. 혹시 나만 이러는 걸까. 인생이 왜 재미가 없고 점점 더 힘들기만 한지. 월급날에는 그래도 조금은 행복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나갈 곳도, 돈 쓸 곳도 없으니 그것마저도 시큰둥하다. 바쁜 날에는 바빠서, 한가한 날에는 지루해서 괴롭다. 그중에서도 오늘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내일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가장 참기 어렵고 짜증 난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래서 일단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자기 계발서부터 심리학 서적, 뇌과학, 에세이와 소설까지 가리지 않고 내 고민 해결의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닥치는 대로 읽어 내려간다. 조언이 절실하지만 이렇게 우울하고 무기력할 때에는 누군가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조차 힘들고 버겁다. 고맙게도 책은 작가와 조용히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매개체 역할을 해 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멘탈 관리에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모팅 루틴을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명상과 독서, 내 마음을 관찰하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 위한 글쓰기 등 아침에 일어나 하나 둘 시험 삼아 시작했던 것들이 이제는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사실 모닝 루틴을 꾸준히 해온 덕분에 지금 내 상황이 이보다 더 심각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하다. 적어도 일상생활은 가능하니까.


평소에 자주 보던 유튜버가 글쓰기 그룹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올렸다. 그녀처럼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과 함께 글을 쓰면 나도 덩달아 힘이 날 것 같아 지원했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 틈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으며 작고 느린 걸음으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작년에 열심히 하다가 그만둔 요가도 다시 시작했다. 아이패드를 펴놓고 요가 동영상을 보며 안 써서 뻣뻣해진 근육들을 조금씩 풀어준다. 요가 동작을 따라 하며 몸에 느껴지는 열기와 호흡에 집중하는 건 해도 해도 어렵다. 그래도 요가를 끝내고 샤워를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재택근무가 지겹다고 오늘도 습관처럼 불평을 하다가 그러면 코로나 이전에 출근하던 시절은 즐거웠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끊임없이 나의 현재를 과거나 미래와 비교하면서, 지금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연연하는 삶에 낙이 있을 리가. 김밥나라에서 먹던 떡볶이와 김밥도 지금 당장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더 먹고 싶은 것처럼. 오늘은 냉장고에서 양념에 재워둔 돼지 목살을 꺼내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쌈밥 정식을 정성껏 차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이전 05화 홈메이드 깻잎 페스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