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분은 내가 정할래
어디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의 기분은 날씨와 같다고. 그래서 비가 오는 날은 그저 비가 오는구나, 햇빛이 가득한 날은 그저 오늘은 날이 밝구나 하고 생각하면 되지, 그 이유를 굳이 굳이 찾아내려 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
이 말이 나는 참 좋았다. 지나치게 계획적이고 분석적이라서 사람을 질리게 한다는 istj 유형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도 기어코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찾아내려 애를 썼었다. 내 성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도 기분이 날씨와 같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기분이 날씨와 같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순간부터, 내 기분을 있는 그대로 매일매일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워졌다.
있는 그대로의 기분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내게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과도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기분이 너무 좋아 들뜨면 평소에 하지 않던 실수를 하게 될까 봐 두려웠고, 기분이 좋지 않아 가라앉는 날에는 그런 우울한 내가 싫었다. 우울한 날은 그냥 비가 오는 것처럼 자연스레 우울한 날이라고 생각을 바꾼 후로, 우울한 감정을 느끼는 나를 싫어할 이유가 없어졌고, '우울함'도 자연스러운 하나의 내 감정이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그 '우울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해서, 우울함을 떨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었다. 둘은 다른 문제다. 오늘은 내 기분에 비가 오는 우울한 날이라는 걸 알아차리게 되면, 그 우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혼자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다. 정말 사소한 것들이지만, 오늘은 그 작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 한다.
먼저, 유튜브로 음악을 튼다. 이때는 한 곡짜리 듣고 싶은 음악보다 playlist로 유투버가 임의로 꾸려 놓은 노래 다발들을 제목을 보고 끌리는 걸 트는 게 좋더라. 모르는 사람이 만든 그 playlist를 듣다 보면 아는 노래도 있지만 모르는, 처음 듣는 새로운 음악들이 많다. 그 새로운 음악들에서 내 취향의 노래를 발견하면 어딘지 더 반갑고 기쁘다. 새로운 음악들은 또한 가사에 더욱 귀를 기울여 듣게 되어서, 그 노랫말들에 많은 위로를 받는다. 이 때 꼭 방의 창문을 활짝 열고 노래를 듣는다. 계절에 따라 바람의 세기는 다르겠지만, 바깥에서 자연스레 불어오는 바람과 무어라 설명할 순 없지만 방 안의 냄새와는 묘하게 다른 은은한 바깥 냄새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한다. 아래는 내가 좋아하는 playlist 유투버 중 한 명이다.
둘째로, 장을 봐와서 오직 나를 위해 정성껏 요리하여 예쁘게 플레이팅 해서 먹는 것이다. 가끔은 혼자서는 다 먹지 못할 양의 매운 떡볶이와 같은 배달음식을 주문해서 먹으며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금방 배가 차서 생각보다 많이 먹지도 못하고, 쓰레기가 많이 나와서 그걸 치우는 것과, 다음 날 속이 더부룩한 걸 느끼면서 전 날을 좀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이 방법을 개인적으로 추천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건강한 재료들로 장을 봐와서, 평소라면 손이 많이 가서 망설였을 그런 요리를, 혼자서 차려 먹는 것은 내 건강과 내 기분에 모두 굉장히 유익한 일이다. 누군가 나를 위해 정성껏 차려준 요리를 먹으면 괜스레 대접받는 것 같아 우쭐해지는 느낌을 다들 받아본 적 있을 것이다. 사실 이거는 내가 나를 위해 정성껏 요리를 차려 먹어도 비슷하다. 내가 나를 대접해 주는 것 같다. 나는 소중하고, 대접받아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평소라면 설거지가 귀찮아서 프라이팬이나 냄비채로 먹을 법한 요리도 이런 날은 좋아하는 접시를 꺼내 정성껏 플레이팅 해서 먹어야 한다.
세 번째로, 쌓인 집안일을 하며 집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우울하면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은 게 다반사지만, 일단 일어나서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뽀송한 섬유유연제 냄새를 맡으면 벌써 기분이 좀 나아진다. 세탁기가 도는 동안 집의 창문을 다 열어 환기도 시키고, 청소기도 돌리고, 물걸레질도 해준다. 늦게 들어와 바닥에 대충 던져놓은 여러 물건들을 원래 그것들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잘 정리해준다. 우울할 땐 화장실 청소도 아주 좋다. 변기와 세면대를 청소하고, 하수구에 걸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안 쓰는 칫솔로 구석구석 낀 때를 닦아주고 나면 내 기분도 전보다 깨끗해진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렇게 하다 보면 세탁기가 다 돌아 있을 것이다. 살짝 달달하면서도 나른한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세탁물들을 꺼내 팡팡 털어서 빨랫대에 널다 보면 내 기분도 그 세탁물들처럼 우울함이 팡팡 털어지는 것만 같다. 집도 깨끗해지고 기분도 나아지는 일타쌍피!
부제목을 '내 기분은 내가 정할래'라고 짓기는 했지만, 그건 나의 소망일 뿐 내 기분은 내 것이지만 또 온전히 내 것은 아니다. 기쁘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우울해지고 싶다고 해서 갑자기 또 눈물 날 것처럼 우울해지는 것도 아니다. 기분이 보일러처럼 내 마음대로 온도를 정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 혼자 살기 시작했을 때는 우울하면 몇일씩 집 안에 틀어박혀 모든 연락을 받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했었다. 그 다운된 기분에서 벗어나기가, 우울한 기분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괜히 그 기분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홀로 고립되는 것을 택하곤 했었다.
혼자 살기 시작한 지 5년, 이제는 '기분'님을 관리하는 데에도 작은 노하우가 생겼다. 그리고 내 노하우가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결론은 다들 우울하면 일단 일어나서 빨래를 돌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