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책임

우울증을 앓는 20대 자취생이 강아지를 입양했다. 그것도 세 마리나.

by 허소희


2018년 3월 정신과에서 첫 진단을 받고 3년 뒤 첫 번째 자살 시도를 했다.

에어비앤비로 잡은 숙소에서 그대로 실려나가 가까운 응급실로 갔던 곳이 지금까지 다니고 있는 병원이다.

내 우울은 조금 더 심해져서 양극성장애(조울증) 진단을 받았고 그때부터 3년 정도 정신병동 입퇴원을 반복하며 격동의 시간을 보냈다.

2022년에 폐쇄병동을 퇴원고 아직까지는 입원치료 없이 급실과 외래진료만으로 3년이 흘렀다.



처음 부모님은 내 정신과 진단을 받아들이지 못하셨고 나는 거기서 좀 탈이 났던 것 같다.

24살이나 먹고도 부모님의 인생이 세상의 전부였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내 고통을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의 모습에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내가 죽어야 할 첫 번째 이유가 생겼다.





아빠와 엄마는 서로를 미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는 늘 식탁에서 캔맥주를 까며 울고 있었고 그 모습을 어찌나 자주 봤는지 지금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진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써준 편지와 작은 쪽지들까지 다 보관하고 있었는데 엄마의 기분을 위로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요즘엔 엄마 기분이 별로 안 좋은 것 같아요. 아빠랑 사이가 별로 안 좋은가요?'

'엄마! 힘내세요. 왜 그럴게 풀 죽어있어요? 힘들 땐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오늘도 힘내서 새 하루를 시작해야죠. 사랑해요!'

'엄마가 아무것도 안 먹고 아파서 누워만 있어서 드립니다. 제가요, 먹을 거 드리는 거는 이까진데 더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주세요. 엄마가 배고프실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디저트 드립니다.'






입대한 지 1년이 좀 안된 동생이 휴가를 나와서 가족이 오랜만에 모인 자리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분위기였다. 우리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는 항상 이랬던 것 같다. 나는 아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딸이을 거다.

집에서 모였으면 더 무서웠을 것 같은데 바깥에서 보는 거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엄마가 아빠한테 머리를 가격 당해 먼저 나갔고, 동생과 나는 아빠 차를 타고 행사장 스피커보다 더 찢어지는 데시벨로 욕을 들으면서 집으로 갔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한 달이 지나서야 엄마한테 말했고, 엄마와 나는 아빠한테 곧장 알리지 않고 망설였는데 이게 화근이었던 것 같다.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서 말을 쉽게 못 했더니 그게 아빠한테는 소외였다.

어쩌면 내 존재가 화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몽땅 담긴 그 집은 이제 우리 집이 아니다. 우리 가족 중 누구도 그 근처를 지나가지 않게 됐다.



연락을 끊다시피 하고 지내는 동안 가정법원에 개명 신청서를 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상상할 수 없는 돌발행동을 저지르고 싶었다.

이름을 왜 바꿨냐고 물어보는 질문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답한다. 학창 시절 왕따로 괴롭힘을 받는 동안 내 이름은 많이 얼룩져서 내 이름만 생각하면 그렇게 기분이 찜찜할 수가 없었다고. 내 입으로 내 이름을 내뱉는 것도, 남한테서 내 이름을 듣는 것도 스트레스였다. 엄마는 그런 이유가 어딨 냐고 했지만 나는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내 이름을 지어준 아빠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개명 허가가 나고 나는 내 이름이 바뀌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 아빠가 나중에 알게 됐고 또 집이 발칵 뒤집어졌지만 뭔가 의적이 된 것 같던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빠의 스트레스는 엄마에게 쌓이고, 엄마의 스트레스는 딸한테 다 품어지고 있었다.

과일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다고 했더니 너는 돈도 없는데 그런 게 먹고 싶냐고 다그치는 엄마도 그때는 미웠다.





강아지를 입양했다. 가족을 만들고 싶었는데 이 연은 생각보다 강력한 생명의 끈이었다.

한 마리면 내가 쉽게 죽을 것 같았고, 두 마리면 좀 고민이 될 것 같았고, 세 마리면 못 죽을 것 같았다.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가 나만 쳐다보고 있다. 끈을 묶어 목을 매달 때조차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도저히 죽을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나는 자살충동이 간간히 들었고 계획을 자주 세웠고 가끔 실행에 옮겼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되고 나밖에 모르는 이 조그만 강아지들이 새카만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탓에 마음 편하게 죽는 일은 사라졌다.

내가 지금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정말로 이 강아지 세 마리 때문이다. 아니, 덕분이다.

폐쇄병동에 들락날락하는 동안 동생이 강아지를 대신 봐주느라 많이 고생했고, 우리 강아지들도 현관문 앞에 붙어서 하염없이 나만 기다리도록 많이 불쌍하게 만들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개탄을 금치 못할 불효자식의 모습이었겠지만 이러나저러나 죽으면 그만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죽음만이 책무였던 나 스스로에 대한 알량한 책임을 지기 위해 나는 내가 데려온 작은 생명들에게 무책임한 짓까지 저지르려고 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침대에 강아지 세 마리와 몸을 붙이고 누운 채로 검색을 했던 적이 있다.

내가 죽으면 키우던 강아지는 어떻게 될까?

그냥 유기견이 된다. 자살현장에서는 말 못 할 꼴을 한 채 남아있는 반려견들이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날 절대 죽을 수 없게 만들었고, 세 마리가 무지개다리를 다 건너면 정성껏 보내준 뒤 그때 죽어야겠다고 내 인생의 종말을 유예했다. 내 죽음은 여전히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오늘까지 흘러오는 사이에 강아지들을 다 보내면 그때 가서 죽을지 말지 다시 결정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별일 없으면 그냥 쭉 살고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어릴 때부터 키워온 반려견이 죽고 나서 자살한 20대 여성의 기사를 봤지만 지금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엄마가 나를 키웠던 마음을 10분의 1 정도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부모자식 간의 사랑보다도 더 완전무결한 사랑이 존재한다는 걸 알아버렸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할 확률은 존재하지만 내가 키우는 내 반려견이 나를 배신할 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두가 나를 미워할 짓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나를 사랑해 줄 존재가 있다는 사실에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내가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가 생겼.

그렇게 태어난 지 3개월쯤에 우리 집에 데려온 아이들이 벌써 곧 8살이다. 이것도 어린 강아지 시절에 잘 못챙겨줬던 어미의 마음이라고, 너네집 개팔자는 진짜 상팔자라는 말이 지금도 가장 듣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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