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람에게는 살아가면서 3번의 기회가 온다고 한다. 고작 3번? 10도 아니고 겨우 3번이라니. 3이라는 숫자가 주는 어감은 제한적이다. 한계가 있다는 건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느껴지게 만든다. 나의 3번의 기회는 어떤 거였지? 놓쳤나? 언제였지? 내게 찾아왔던 기회는? 그럼 이제 내게는 더 이상 기회는 없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회가 나를 찾아온 게 아니고 아예 내가 기회를 만들었던 것 같다. 내 인생의 전환점은 25세였다. 그때 나는 무척 위태로웠다. 겉으로는 아무 고민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생존의 이유가 흔들릴 만큼 어둠이 짙었던 시기였다. 연애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이 의미는 멋지고 잘난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자신의 주제는 파악하지 못하고 잘난 남자를 꿈꾸는 허황된 여자에게 25살은 의미가 없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친구들이 만나는 데이트상대는 한 결 같이 잘나고 능력이 많아 보였다. 그런 남자를 만나고 있는 친구들이 몹시도 부러웠다. 그에 비해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게가 허접했다. 수준 미달인 남자들은 내가 마음에 안 들었고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는 괜한 자격지심이 들어 열등감만 쌓여갔다.
자존감이 바닥이었던 나는 바람을 맞거나, 이별통보의 상처를 받을 때마다 약국마다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조금씩 사서 모았다. 100알을 다 모으면 이 슬픈 세상을 끝장내리라. 하얀 휴지에 싸인 수면제는 털실로 짠 화장품 가방에 넣어두고 틈만 나면 만지작거렸다. 그 비장한 각오가 허술하게 끝나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그날은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그때의 옷차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톰보이 회사에서 나온 빨간 원피스였는데 세일러 스타일의 칼라에 가는 흰 라인으로 강조를 한 강렬한 스타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잠자리 안경 쓰고 긴 머리를 집시처럼 파마를 한 헤어스타일을 했는데 그 옷과 아주 잘 어울렸다. 옷차림만 보면 자존감 만땅이었다. 아마도 겉모습만 보면 돈 많은 여자처럼 보였다.
토요일 오후라 해도 버스 안은 한산했고 한껏 멋을 부렸건만 약속이 없었던 나는 밝은 대낮에 집으로 귀가하던 중이었다. 집에 도착해서 나는 수면제까지 들은 두툼한 화장품 가방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돈뭉치라도 들은 줄 알고 화장품 파우치를 훔쳐간 소매치기가 오히려 불쌍해졌다. 화장품이라고 해봐야 땀이 묻은 붓과 반쯤 남은 아이세도우, 화장수가 담긴 샘플 병들 뿐인데. 쯔쯔. 그것보다 중요했던 건 수면제였다. 꽤 많은 양의 수면제를 잃어버리니 죽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이젠 뭘 하지?
사실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죽고 싶었다면 야금야금 수면제를 모았겠는가? 100알짜리 수면제를 한 통 샀었겠지. 그냥 분풀이가 필요했다. 나를 싫다는 남자에게 화가 났고 남들보다 잘나지 못한 내 처지가 화가 났다. 죽는 데도 핑계를 대던 나는 수면제를 잃어버리자 애초부터 나는 죽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럼, 살아야지. 어떻게? 고민을 했다. 그래서 결정했다. 대학을 가기로.
내 인생에 있어 뭔가 결심을 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걸 기회라고 말한다면 분명 기회였다. 인생에 찾아온다는 3번 기회 중에 1번의 기회는 그렇게 시작됐다. 학벌이 곧 신분인 사회에서 대학졸업장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그보다 저 중요했던 건 그동안 한 번도 나는 꾸준히 뭔가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걸 시험해보고 싶었다. 지금 웹툰을 그리겠다는 결심이 오늘로써 8일째를 맞이하게 됐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