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한 글자 주제, 살
새해가 되면 깨끗한 다이어리를 조심스럽게 펴놓고 이른바 '올해의 계획', '새해 목표'를 세우는 건 나에게도 꽤 오래된 리추얼이다. 계획과 기록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새 다이어리에 쓰는 1년 치 계획만큼 설레고 긴장되는 것도 없지. 스무 살 언저리 이후로는 매년 빼먹지 않고 올해의 목표를 적어왔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단하고 거창한 계획을 가졌었다는 건 아니다. 한 해 한 해 나이는 들어가는데 어째 세우는 계획이라는 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누구든 그렇지 않을까. 새해에는 뭔가 작년과는 다르게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가 폭발하고, 또 '새해 목표'라는 거창한 제목 아래 시답잖은 것이나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책 많이 읽기, 영어 공부 열심히 하기, 다이어트 하기, 기타 등등. 내가 아니라 비슷한 또래 누구의 다이어리에 갖다 붙여놓아도 어색할 것이 없을 문장들. 꼭 새해 목표라는 게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 문항인 것마냥, 이미 세상에서 정해놓은 것 중에 취사선택하여 골라 넣을 수 있을 뿐 나만의 항목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마냥. 이십 대 초반에는 영어 공부가 빠지면 영 새해 목표 같은 느낌이 안 났고 후반이 되면서는 다이어트가 그랬다. 딱히 뭐 대단한 걸 하겠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냥 디폴트 값으로 넣는, 빠지면 왠지 섭섭할 것 같던 문구들.
올해는 다이어리에 함부로 펜을 대지 않고 좀 더 신중하게 고민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아마 2020이라는 거창한 숫자도 한몫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2019년 전체를 한 번 돌아보고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게 가장 컸던 것 같다. 2019년 1월의 나도 꽤나 진중하고 그럴듯한 자세로 앉아 열정적으로 1년의 목표를 세웠을 텐데, 2019년 12월의 나는 결코 그 목표치에 도달해있지 못했다. 도달해있기는 커녕 올해의 목표가 뭐였는지 기억도 못 했다. 올해 목표가 뭐였어요? 묻는 말에 어물쩡 어물쩡, 머리를 긁적이며, 다이어리 어디 적혀있을 텐데... 하며 대답을 피했다. 뭐 기껏 해봐야 다이어트나 책 많이 읽기 쯤 되었겠죠. 영어 공부도 있었을 거고, 하하. 나 같은 계획주의자의 관점으로 보기에 2019년은 뭐, 보나 마나 실패한 한 해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를 찬찬히 돌아보다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지나온 것들은 태초의 계획과는 1도 관련이 없이 다 제멋대로인데, 그 시간이 쌓여 묘하게 어떤 방향성을 만들어냈다. 내가 '즉흥적'이라거나 '충동적'이라고 폄하했던 선택들, 계획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던 순간들이 모여 의미가 되었다. 그걸 모아놓고 보니 오히려 뜬구름 잡는 새해 목표보다 내 마음에 꼭 맞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참고 툭툭 질렀던 것이 쌓였으니 그럴 법도 했다.
'계획 없이는 못 살아'를 입에 달고 살던 내게는 적잖이 큰 깨달음이었다. 반동이 꽤 세서, 처음에는 아예 새해 목표 같은 걸 세우지 않을 요량이었다. 그러나 충격은 충격이고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라. 어쨌든 계획 없이 살 수는 없는 나는 스스로와 조금 타협했다. 세상도 나도 너무 빨리 변하는 듯한 요즘이라 1년이라는 기간이 어떤 목표를 세우고 수행하고 점검하기엔 너무 길었던 모양이니, 그 기간을 줄여보기로. 대망의 2020년 1월 1일, 나는 올해의 계획 대신 1월의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아, 정정한다. 계획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감이 있다. 대망의 2020년 1월 1일, 나는 1월의 마지노선을 정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계획을 세우거나 앞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를 정하는 대신, '되는대로 막 살더라도 이것만은 지켜보자'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의 맥시멈을 미리 정해놓고 달려가기보다 차라리 미니멈을 정해보자는 방향이었다. 나 같이 막 돼먹은(?) 완벽주의자들은 일단 100이라는 목표를 세워놓으면 0과 99 사이의 어떤 값도 '그래, 이 정도면 성공이야'라고 너그럽게 인정해주지 못한다. 아슬아슬하게만 못 미쳐도 생각의 회로는 제멋대로 날뛴다. 난 망했어, 어차피 100이 아닌 건 0이랑 똑같아, 98? 소용없어, 안 해, 그만해, 때려치워- 의 수순을 밟는달까. 역으로 아예 0에서 주저앉아 저 높은 곳에 있는 100을 올려다보다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우와 높다, 멀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저기까진 못 갈 거야, 50까지 가다 포기하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지금 포기하자, 안 해, 때려치워- 결론은 똑같다.
그럴 바에 나는 한 30 정도의 마지노선을 그어보기로 했다. 좋아, 네가 하고 싶은 거 다 해. 대신 적어도 이만큼의 마지노선은 지키자. 딱 한 달만 해봐. 이게 너무 어려우면 다음엔 27에 선을 그어줄게. 2월에 다시 기회가 있으니까 괜찮아. 동시에 어떤 것이든 최대한 잘게 쪼개서 작고 단순한 행동으로 나누어 보고자 했다. 멀리 보고 달려갈 수 있는 거대한 목표가 아니라 당장 오늘, 행동 하나로 결괏값이 바뀔 수 있도록. 다시 말하지만 이 자신감은 제멋대로 산 2019년을 반추하는 데서 비롯했다.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인생이 어느 쪽으로든 잘 흘러가고 있었다는 안도감. 그러니 가끔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에 나를 맡겨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여간 그렇게 해서 정해진 1월의 마지노선 5개는 아래와 같다.
1. 브런치에 글을 4편 올린다.
2. 66% 베지테리언 식사(하루에 한 끼만 육식을 허용하는 식사)에 도전하며, 매일 기록한다.
3. 요가를 12번 간다.
4. 출퇴근길에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이북리더기를 든다. 영상물을 보는 대신 책을 읽는다.
5. 읽은 책과 본 영화에 대해 기록한다 - 각각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과 왓챠에.
언제나 매년 1월은 모든 이들이 헬스장에 가장 많이 가는 달. 그러니까 나에게도 일종의 '새해 버프'가 있었다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효과는 꽤 좋았다. 물론 큰 틀에서 보면 내가 기존에 세우던 1년 계획과 방향성 자체는 비슷하다. 아마 내가 올해 그대로 새해 목표를 세웠어도, 거기엔 분명 1번과 거의 똑같이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쓴다' 같은 것이 들어갔을 테다. 예전에는 이렇게 우선 큰 목표를 잡은 뒤에 이걸 월별로 쪼개고 주별로 쪼개고 또 일별로 쪼개고 했었다. 이것도 나쁜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말했듯이, 너무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게 문제였다. '브런치에 글을 꾸준히 쓰는 것'을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이라고 정의하면 1월에는 4편을 써야 하는데, 이 목표의 기한은 결코 1월 31일이 아니므로 슬그머니 미루는 버릇이 고개를 든다. 1월에는 비록 3편밖에 못 썼지만 2월에 5편을 써서 구멍을 메꾸면 되니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2월에는 겨우 2개의 글을 쓴다. 그리고 그즈음-새해 버프도 거의 바닥날 즈음-슬슬 생각하는 것이다. 아, 이렇게 된 이상 글을 꾸준히 쓰는 건 이미 망했다. 그렇게 3월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게 된다.
반대로 한 달의 마지노선을 긋고 나니 생각의 방향도 바뀌었다. 항상 100을 올려다보며 부담스럽게 달리던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30을 채우고서 그 위에 앉아 빈둥빈둥 곁가지를 칠 여유가 생겼달까. 목표가 저 멀리 달나라에 있지 않고 바로 눈 앞에, 오늘의 행동 딱 하나에 달려 있으니 스스로를 채찍질하기도 훨씬 쉬웠다. 게다가 이 마지노선의 만료 기일은 1월 31일, 더 이상 미룰 여유가 없기도 했고. 그렇게 나는 1월 31일 23시 59분에 1월의 네 번째 글을 브런치에 올렸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마지노선은 지켰는데, 브런치에는 작성일이 2월 1일로 떠서 조금 슬펐다). 비슷한 식으로 모두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켰다. 요가는 정확히 딱 12번을 갔고, 66% 베지테리언 식사에는 31일 중 5일을 실패했으나 그래도 모든 식단을 기록하여 체크했고, 출퇴근길에 이북리더기를 품고 다니는 것을 반복하여 1월 간 총 7권의 책을 읽었다. 그 7권의 책에 대한 내 감상을 짧게나마 모두 남겼고, 1월에 본 영화 8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올레!
1월은 이렇게 성공으로 막을 내리고, 나는 이 한 달을 반추하며 다시 2월의 선을 정했다. 월별로 정하는 것의 장점이 여기 또 있다.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바로바로 피드백이 되어 다음 달의 계획을 위한 자산이 된다는 것. 1월에 성공한 것, 하고 나서 좋았던 것, 뿌듯했던 것은 계속 똑같이 (혹은 좀 더 잘) 이어나가면 된다. 새롭게 하고 싶은 게 생겼다면 추가하고, 영 아니었던 것은 뺄 수도 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결코 대망의 새해 계획을 매번 지우개로 박박 지워야 하는 건 아니므로, 계획을 또 못 지켰다는 패배감이나 자괴감 없이, 훨씬 더 가볍고 시의성 있게 방향을 수정할 수 있다.
만약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비슷한 새해 계획을 세우고 비슷하게 실패했다면 이렇게 거꾸로 올라가는 새해 계획을 세워봐도 좋겠다. 작은 행동으로 쪼개고 월별로 쪼개기만 해도 훨씬 달성율도 높아지고 동기부여도 쉽다. 행동 목록을 정하는 데 있어 내가 세운 기준은 딱 하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나 주변의 압박이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기준 같은 것과 상관없이, 내가 지금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이렇게 규정하자 매년 생각 없이 리스트에 넣던 것 중 대다수가 탈락했다. 대표적으로 다이어트 같은 것 (모호한 단어이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욕망하는 건 그냥 살을 빼는 다이어트보단 차라리 다리 찢기를 더 잘하는 것인 듯하다). 물론 규정하자마자 바로 구별이 된 건 아니고 이 욕망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하나하나 곰곰이 생각해야 했지만. 최근에 읽은 한 인터뷰에서 정세랑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그 중요성을 적확하게 표현하신 듯하여 적어둔다. 앞으로도 어떤 목표든 계획이든 마지노선이든 내 삶의 큰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들에 대해 생각할 때 계속해서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 비록 종종 어쩔 수 없이 용기를 잃더라도.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지 외부로부터 온 욕망인지 구별해봤으면 좋겠어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움직이면 결국 후회하게 되니까요. 사회에서 우리가 이걸 원한다고 세뇌하는데, 이게 과연 내 욕망인가? 생각해보면 아닐 때가 많아요. 저도 아직 잘 못하고 있지만, 함께 이야기하면서 정교해지면 좋겠어요.
출처: <정세랑, 패자부활전에서 살아남은 작가>, YES24 문화웹진 채널예스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고 자화자찬하긴 했지만, 2020년이 그 거창한 숫자만큼이나 크게 성장하는 한 해가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나는 겨우 1월의 '마지노선'을 채웠을 따름이고, 무엇 무엇을 이루었다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금 생각하건대 인생의 의미는 결코 무엇을 이뤄내는지가 아니라 오늘 하루를 얼마나 충만히 살았는지에 있다. 나에게는 그저 그 하루하루가 지나치게 산발적인 나날들이 되지 않도록 잡아줄 약간의 바운더리가 필요할 뿐. 이 선과 함께라면 적어도 나 자신의 모순에, 혹은 거창한 계획과 미진한 스스로의 간극에 갇혀 이도 저도 못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1월의 출발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산뜻하다. 2월도 그런 한 달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