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날엔 밥도 건너뛰고 싶다
인생은 때론 심심풀이로 주워 먹는 고구마말랭이의 맛과 같지 않을까, 지금 봉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소파에 몸을 옆으로 뉘여 중력을 분산시키고 눈은 TV를 향해 고정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여 말린 고구마와 감을 집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하루 종일 배가 고프질 않다. 가끔 물을 마실 때나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만 잠깐씩 일어나면 된다.
이 일의 시작은 이모님께서 바리바리 싸 주신 음식들에 있었다. 지난 번 김장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모님은 말 그대로 이삿짐과 맞먹는 음식들을 싸주셨다. 뒷마당 장독대에서 덜어온 고추장과 된장 그리고 간장, 어디선가 꺼내 오신 청국장부터 시작해서 부지런히 말려두었던 호박과 가지, 작년 시래기와 우거지 뿐 아니라 봉구가 맛있게 먹었던 각종 젓갈에 앞집 뒷집 옆집에서 받아두었던 감과 옥수수 그리고 고구마와 무까지. 봉구네 차 트렁크에는 다 들어가지도 않아서 학규의 차 뒷자리에 간신히 싣고 올라올 정도였다.
그 덕분에 한동안은 식사 준비가 아주 수월했다. 이모님이 주신 된장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지 따로 육수를 내지 않아도 구수하니 맛이 좋았다. 간장 역시 감칠맛이 있어서 대충 두르고 채소를 볶기만 해도 입에 착착 붙었다. 봉구는 고민할 필요 없이 이모님이 주신 것들을 꺼내 끓이고 볶고 쌀을 씻어 안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이전의 봉구라면 좋은 재료를 받았으니 신이 나서 요리를 하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의 봉구는 그리 신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아무 것도 하기가 싫었다. 서린이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나면, 자꾸만 눕고 싶었다. 겨울이 되면서 해가 짧아진 탓인지 이상하게 자꾸 잠이 쏟아지고 피곤했다. 어쩌면 이런 것이 김장 후유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봉구는 하루 이틀 정도만 쉬었다 가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것처럼 소파에 누워 TV를 켰다. 하지만 딱히 볼 건 없었다. 분명 처음 보는 것인데도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아침 드라마와, 볼수록 건강이 걱정되고 뭘 사야 할 것 같은 정보 프로그램뿐이었다. 그렇게 할 일 없이 리모콘만 돌리다가 점심때가 되었다.
봉구는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딱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팬트리에 들어가 이모님이 싸주신 사과를 한 알 씻어 깨물어 먹었다. 그러면서 또 다시 TV를 봤다. 수많은 채널 중 어디 한군데에서는, 볼 만한 드라마나 영화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서린이를 데리러 가기 직전까지 소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린이를 유치원에서 데리고 오고 나서 봉구는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이모님이 주신 음식들이 잔뜩 있었기 때문에 딱히 할 건 없었다. 지연이 올 시간에 맞춰 식탁을 차릴 뿐이었다. 그런데...
왠지 밥맛이 없었다.
“봉구 씨, 밥 안 먹어? 어디 아파?”
지연이 봉구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음. 열은 없는데.”
“괜찮아. 나 하나도 안 아파.”
그런 일이 며칠 째 계속 됐다. 겨울을 맞이한 올리브나무처럼 봉구는 어딘지 모르게 시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식탁에는 매번 된장국과 밥, 이모님이 싸준 나물과 젓갈만 올라왔다. 거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지연은 그런 봉구가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분명 일주일 전만 해도 봉구는 온갖 요리를 섭렵하기 바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마트를 다녀왔고 새로운 요리를 선보였다. 지연은 그런 봉구의 맛있는 요리를 먹느라 살이 찌는 것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요 며칠 봉구는 달라졌다. 그러자 집안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봉구 씨, 이거 썩었어.”
물티슈를 찾으러 팬트리에 들어갔던 지연이 놀라서 봉구를 불렀다.
“어? 뭐가 썩었어?”
“이모가 싸주신 감. 어머, 고구마도 썩기 시작했네?”
썩은 감과 고구마를 본 봉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에 지연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사람이었다. 봉구는 음식을 버리는 걸 싫어한다. 어떤 재료든, 어떤 음식이든 상태가 나빠지려고 하면 봉구는 모조리 먹어치웠다. 매번 다른 요리를 하던 사람이 며칠 째 똑같은 요리만 하고, 음식 버리는 걸 싫어하던 사람이 썩을 때까지 들여다보지 않다니. 이 남자, 정말 괜찮은 걸까.
“미안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네.”
“아니야. 이모가 너무 많이 싸주긴 했지. 같이 정리하자.”
“아냐. 내가 할게. 지연 씨는 가서 쉬어요.”
봉투를 가지고 와 썩은 감과 고구마를 골라내는 봉구의 어깨가 축 쳐져 있었다. 그때였다.
따르르릉
지연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새 구 서방 바빠? 왜 오질 않아?”
“엄마! 구 서방이 뭐 그 집 청소하는 사람이야? 내가 부르지 말랬지!”
“얘는 또 이런다. 내가 부르니? 구 서방이 좋아서 오는 거지? 와서 청소 좀 해주고는 비싼 거 하나씩 집어가는 거, 그거 너 몰라? 지난번에는 너 고기 구워준다고 돌판을 가져갔어. 그거 비싼 건데.”
“어차피 엄마는 집에서 쓰지도 않잖아요. 그런 게 대체 엄마 집에 왜 있는 거야?”
“아무튼. 구 서방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그 말에 지연은 조금 놀랐다. 설마 지금 엄마가 우리 봉구 씨 걱정 하는 건가?
“안 아파. 안 아픈데....”
지연은 여전히 팬트리 안에 있는 봉구를 슬쩍 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근데 좀 이상해. 어째 며칠 기운이 없고 밥을 잘 안 먹어.”
“구 서방이 밥을 안 먹어? 그거 큰 일 아니니?”
“그러니까. 근데 나도 이유를 모르겠네. 아픈 건 아니라는데.”
“얘, 내일 당장 우리 집으로 보내.”
“뭐? 왜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구.”
“잔소리를 왜 해. 다 큰 어른한테. 잔말 말고 우리 집에 보내.”
지연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 봉구가 안방으로 들어왔어.
“썩은 건 다 정리했어. 미안해. 다음부터는 내가 잘 관리할게. 장모님 전화야?”
“어... 저기...”
“장모님이 나보고 내일 오라셔?”
“어... 내가 자기 바쁘다고 했는데... 내일은 꼭 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네.”
“응 알았어. 걱정하지 마.”
어째서인지 지연은 엄마가 시키는대로 해버리고 말았다. 엄마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다음 날 지연은 회사에서도 딱히 손에 일이 잡히질 않았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돈 좀 번다는 이유로 자신도 모르게 봉구를 무시했던 건 아닌지, 서운할만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닌지 계속 걱정이 되었다.
“팀장님, 점심 먹으러 가요.”
“아. 나 오늘 속이 안 좋아서. 가서 먹고들 오세요.”
결국 지연은 점심을 건너뛰고 말았다. 마음 같아서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봉구 씨가 왔는지, 와서 뭘 했는지, 엄마는 또 무슨 소리를 했는지 꼬치꼬치 묻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지연은 6시가 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들어가요. 다들 칼퇴하세요.”
부지런히 차를 몰아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세우고 지연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해결해야 한다.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봉구는 지연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그런 봉구가 힘들어하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해야 한다. 일단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부터 싹 받으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여행도 가자고 해야겠다. 이번에는 서린이랑 같이 다 함께 해외로 나가볼까. 아니면 지난번처럼 카드를 주고 쇼핑을 하라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앞에 내렸을 때 지연은 알 수 있었다. 봉구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그것은 갈치조림 냄새였다. 비릿하고 달큰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문 밖까지 새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봉구는 오늘 저녁을 위해 새로운 요리를 했고, 그건 봉구가 이전의 봉구로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지연은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다녀오셨어요!”
“지연 씨, 왔어?”
앞뒤로 선 서린이와 봉구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지연의 코가 매워졌다. 이어 눈앞이 흐려졌다.
“지연 씨, 왜 울어? 무슨 일 있었어요? 어디 아파?”
놀란 봉구가 달려와 지연을 안아주었다. 그러자 서린이도 작은 팔을 뻗어 지연과 봉구를 안아주었다.
“아니. 배고파서. 봉구 씨, 나 배고파.”
그 말에 봉구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지연의 가방을 받아 내려놓고 지연의 손을 잡아 식탁으로 데려갔다. 식탁에는 역시나 갈치조림이 보글보글 끓으며 자리 잡고 있었다. 봉구는 자리에 앉아 부지런히 갈치 살을 발라 지연과 서린이의 밥 위에 놓아주었다. 하얀 밥 위에 놓인 빨간 생선살이 정말 맛있게 보였다. 지연은 얼른 밥을 떠 넣었다.
“맛있다.”
“몸살 약 좀 사 올까?”
“아니.”
지연은 봉구를 가만히 바라봤다. 자신이 아는 봉구 씨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봉구 씨도 먹어. 요 며칠 밥 잘 못 먹었잖아.”
“난 배가 안 고파.”
“아...”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에 지연은 시무룩해졌다. 봉구의 문제는 아직 해결이 되지 않은 걸까.
“아빠, 아까 감을 이따만큼 먹었어. 고구마도 이따만큼 먹고.”
서린이가 두 팔을 크게 펼치며 말했다.
“고구마랑 감?”
지연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봉구를 바라봤다. 그러자 봉구가 일어나 주방으로 가더니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에서 뭔가를 꺼내왔다. 감과 고구마 말랭이였다. 지연은 봉구가 건네는 감과 고구마 말랭이를 차례로 먹었다. 달고 쫄깃하면서도 아주 맛있었다.
“맛있다! 이거 봉구 씨가 한 거야?”
“아니, 쟤가.”
봉구는 아까 그 네모난 플라스틱 상자를 가리켰다.
“장모님이 주셨어. 식품 건조기래. 감 말리면 맛있다고 해서 남은 감 썰어 넣었는데, 얼마나 말랐는지 궁금해서 계속 꺼내 먹었더니 아직도 배가 불러.”
봉구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연은 여전히 불안했다.
“봉구 씨 괜찮은 거지? 어디 아프거나 힘든 일 있는 거면 나한테 꼭 말해. 이참에 우리 병원에 한 번 가보자. 봉구 씨 검진 받은 지 얼마나 됐지? 아니면 우리 여행 갈까? 봉구 씨 사고 싶은 거 있으면 사도 돼.”
“지연 씨, 혹시 내 걱정한 거야?”
“...”
지연의 눈에 또 다시 눈물이 고였다. 그러자 봉구는 크게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지연 씨.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오늘 장모님 댁에도 잘 다녀왔고, 그리고 매우 건강해. 검진도 회사 짤리기 전에 다 받았고 아무 문제 없었어. 내가 어쩌다 지연 씨를 걱정시켰는지 모르겠는데....”
봉구가 이렇게나 말을 길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그 모습에 지연은 피식 웃음이 났다.
“봉구 씨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아. 그냥 요새 봉구 씨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걱정됐었어.”
“요즘...”
봉구의 눈이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긴. 요즘 이상하게 음식하기가 싫었어.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는데... 장모님 댁 다녀오고 나서 좀 괜찮아진 것 같아. 아 참, 이 갈치도 장모님이 주신거야. 지연 씨 조림 해주라고.”
다음 날 지연은 출근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한 거야? 우리 봉구 씨, 어떻게 구워삶았어?”
“구워삶긴 뭘 구워 삶어, 다 큰 어른을. 그냥 일 좀 시켰지.”
“또 일을 시켰어? 엄마, 그 식품건조기 주면서 너무 많이 부려 먹은 거 아냐?”
일 시켰다는 말에 지연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럴 땐 몸을 움직여야 돼! 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리부터 빽 지르고 그러니!”
“....미안해요.”
곧바로 사과하는 지연의 말에 엄마도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늬 이모 말이다. 참 사람이 좋지만 말이다. 그 사람 좋은 사람이 요리도 참 잘하잖니. 그게 또 상대방을 피 말리게 할 때가 있어. 나도 가끔 늬 아빠랑 언니네 갔다 오면 그렇게 냉장고 쪽은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어차피 뭘 해도 언니랑 비교 될 테니까. 언니 된장으로 끓여도, 언니 간장으로 볶아도 어딘가 모르게 맛이 다르더라고. 그래서 한 며칠 안 하다보면 냉장고가 엉망이 되거든. 그러면 또 짜증이 나고. 살림하는 사람은 마음이 그럴 때가 있어.”
“봉구 씨가 이모 때문에 우울했었다는 거야?”
“뭐 그게 꼭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내 경우에는 그랬다는 거지. 그럴 땐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해야 돼. 머리를 비우는 거야.”
분명 전주 이모의 밥은 매우 맛있었다. 된장과 고추장, 간장의 맛도 일품이었지만 아마도 이모의 손맛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손맛이라는 것은 유튜브를 보고 배울 수 없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 봉구는 이모의 손맛을 보면서 어떤 장벽 같은 걸 느꼈던 걸까.
회사에서도 그럴 때가 있다. 타고난 감각으로 기획서를 뚝딱 만들어낸다거나, 말을 예쁘게 해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직원이 있다. 지연이 따라갈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 직원을 만날 때마다 지연은 부러워하기 보다는 그들의 장점을 인정하고 자신의 장점과 접점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집 안에서 혼자 요리를 하던 봉구에게는 이모의 손맛을 본 것이 어쩌면 충격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구는 그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날 저녁 집에 돌아갔을 때, 현관 앞에서는 구수한 된장 냄새가 났다. 잠시 후 지연의 앞에는 푸짐한 감자탕이 놓였다.
“맛있다. 봉구 씨 진짜 맛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배 안 불러? 봉구 씨도 잘 먹네.”
“응 배 안 불러. 오늘은 말랭이 안 먹었어.”
“엄마, 오늘 말랭이 간식으로 싸 갔는데, 완전 인기 많았어. 선생님들이랑 친구들이랑 다 나눠줬어.”
“그래? 엄마도 오늘 저녁에 좀 먹어봐야겠다.”
그렇게 봉구와 지연, 서린이까지 모두가 소파에 앉아 말랭이를 먹으며 TV로 영화를 보았다. 추운 겨울 날 고향집을 찾아가 된장국을 끓여먹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리틀 포레스트]였다. 봉구는 지연에게 담요를 덮어주었고 서린이는 지연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봉구 씨. 말랭이 맛있다.”
“지연 씨도 회사에 좀 싸가. 많이 했어.”
“응.”
지연은 굳이 봉구를 위로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의 방황이 있더라도 봉구는 반드시 이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이제는 믿기로 했다.
다음 날 봉구는 말랭이를 먹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하루를 보냈다. 지연이 오늘 하루는 휴가라며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소파 위에서 잠깐 졸기도 했다가 심심하면 고구마 말랭이로 바꾸어서 먹기도 하면서 봉구는 하루를 보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은 학규의 레스토랑에 가서 먹을 것이다. 현경의 소개팅 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오늘은 정말로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
요 며칠 봉구는 이상했다. 기운이 없고 의욕도 없었다. 장모님이 부르셨을 때도 사실 가기 싫었다. 하지만 막상 가서 엉망인 장모님 집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팔을 걷어 부치고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엄살을 부리듯 여기저기도 청소해야 한다며 시키시더니 집에 가기 전에 식품 건조기를 내미셨다.
“감이 썩고 있지? 얼른 가서 말려봐.”
어떻게 알았지. 썩은 감은 봉구에게 상처였다. 나도 이렇게까지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고, 두렵기도 했다. 내 인생에 썩어서 버리는 음식이 생기다니 말이다. 장모님에게서 받아온 식품 건조기를 곧바로 씻고 감을 썰어 넣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기운이 돌았다. 인생의 어느 한 고비를 넘어 온 것도 같았다.
인생은 아무래도 드러누워서 주워 먹는 감 말랭이 같은 맛이라고 봉구는 지금 생각한다. 밥 먹기 싫은 날에는 이런 것도 좀 주워 먹으면서, 일하기 싫을 때는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시간을 건너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지연이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고, 서린이는 열심히 자라고 있으므로 봉구도 다시 일어나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해야 한다. 그건 내일 하자. 오늘 하루만큼은 그냥 쉬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