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픈 것이 두려웠습니다. 저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였습니다.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나면 편해지리라, 그런 회피의 장소로 죽음을 떠올렸던 것뿐이었습니다. 그 생각이 짙어져 매일 매 순간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을 때에, 사소한 문제만 코앞에 닥쳐도 패닉에 빠져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난 뒤 저는 입사 후 연락도 그리 주고받지 않던, 그저 트라우마로 인해 많이 아프고 힘들었다고 알고 있던 그 언니에게 앞뒤 가리지 못하고 연락해 병원을 알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실례가 되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그걸 가리지 못했습니다. 펑펑 울면서 너무 힘들다고, 도와 달라고. 연락을 받은 언니가 다정한 다독임과 함께 연결해 준 회사 정신건강 담당자님을 통해 병원을 예약하고 한국에 휴가를 가서 정신과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언니와는 지금도 다가와준 것에, 다가간 저를 감싸준 것에 서로가 감사하며 돈독히 지내고 있습니다.(지금 이 글을 보고 있겠지요?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남자 친구를 울린 적이 있습니다. 울었던 이야기를 글로 박제한 것을 알면 화를 낼 지도 민망해할지도 모르겠지만, 함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보던 중 상우의 번개탄 자살기도 장면에서였습니다. 무심결에 “저렇게 연기가 문 틈으로 빠져나가게 두면 안 되지, 테이프로 다 막아야 되지 않나?”라고 중얼거린 혼잣말에 남자 친구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너 그걸 왜 아냐는 거였습니다. 그런 걸 인터넷에 찾아봤냐고 어떻게 아냐며 저를 다그쳤습니다. 제발 그런 거 보지 말라고, 생각하지 말라며 저를 붙잡고 우는 그에게 “그냥 SNS에서 봤어. 그런 것 아니야. 하려고 찾아본 것 아냐.” 하며 겨우 달랬습니다. 그런 생각 다시는 하지 말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한 뒤 상황이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제 우울을 아는 이들이 이렇게 순간을 조마조마해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많이 생각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죽었으면 하는 마음에 스스로를 몰아세운 적도 많았습니다. 몰래 작은 방 안에서 스스로를 해하던 때도 분명 있었습니다. 허세라고 생각했던 그 행위가 저를 위안해주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견딜 만한 신체적 고통으로 치환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무심결에 하던 머리를 스스로 쥐어박거나 스스로의 뺨을 때리던 모든 행위들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은 정신을 차려보니 머리를 말리던 헤어드라이어로 스스로 머리를 내려치고 있는 제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나오는 플라스틱 부분이 떨어져 나가 바닥에 나뒹굴고 머리에서는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저를 괴롭혔던 어른과 같은 방법으로 저를 체벌했습니다. 제가 마음에 들지 않고 미운 순간마다 그랬습니다. 저는, 그 어른들과 다르지 않은 태도로 저를 괴롭혔습니다. 제가 괴롭히고 제가 울었습니다. 아프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 조차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았으니까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습니다.
저를 만나고 난 뒤 카카오톡 프로필에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려두고는, ‘디즈니랜드, 노인정 베프, 언니 자연사 기원’이라고 적어둔 친한 동생이 있습니다. 그 아이도 저와 같은 상실을 겪었습니다. 제 친구이기도 했던 스물다섯에 세상을 떠난 그 아이. 그 상처에서 아직 다 헤어 나오지 못한 친구에게 또다시 비슷한 두려움을 주었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미안합니다. 자연사 기원이라니, 톰 크루즈도 아닌데 말입니다… 주변 친구들이 한 둘 저에게 물어왔습니다. 자연사…? 너 어디 아파…?
제가 상실에 아팠던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아파할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한 몇 번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 순간들이 저를 멈추게 하고, 머물게 해 줍니다. 덕분에 견뎌낸 시간의 끝에 힘겨웠던 시간만큼 더 단단해진, 성장한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저를 붙잡아 세워준 그들에게 제가 받은 것보다 더 큰 사랑과 어떤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들은 이런 저에게 ‘너는 이미 그런 존재’라고 말해줄 사람들이기에, 저는 오늘도 힘을 내어 머뭅니다. 더 좋은 사람으로 그들 곁을 지켜주고 싶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