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진단을 받고, 병무청에서 4급을 받은 뒤로
한편으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앞으로 나는 뭘 하며,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지?
그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서 어울려 일한다는 것.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대인기피증은 이미 심각했고, 사람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만큼
내 증상은 깊어져 있었다.
아무도 나를 해치지 않는데도 나는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 공공근로가 눈에 들어왔다.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정말 내가 할 수 있을까—두려웠다.
그래도 “못 먹어도 고!”
운 좋게 단기 아르바이트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방역활동 명목으로 동네를 돌며 소독약을 뿌리는 일이었다.
구역만 마치면 끝이었으니 나름 꿀알바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꿀알바도 오래 가진 못했다.
코로나가 퍼지고, 선별진료소는 바빠졌다.
방역인원 중 제일 어린 내가 결국 차출됐다.
하루에 1,500명을 받은 적도 있었다.
진상도 있었고, 겁먹은 시민들도 있었다.
방역수칙을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넘쳐났다.
마트에 꼭 들리겠다는 분, 왜 집에만 있어야 하냐는 분, 왜 벌써 끝내냐는 분까지.
가끔은 사족을 더 붙이기가 싫어서 당장의 수칙이 그러하니 지켜달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누명도 썼더랬지. 온라인 검진이 가능해진 시기부터 어르신들의 "아 몰라, 좀 해줘."가 당연스러워지던
어느 날,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에게 어떻게 반말을 하겠는가?
아무리 넉살이 좋아도 그런 예의정도는 인지하며 일을 하는데 대뜸 어떤 어르신이 왜 반말을 하냐고 하더라. 예상치 못한 호통에 얼어붙어버렸다.
반말을 하다니, 그렇게 예의없는 사람이 됐다. "반말 안했습니다."라고 했지만 이미 화가 난 그 분은
버릇을 잘못 들였다느니, 가정교육이 어쩌구.. 귀를 닫아버렸다.
더 들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몰라서 말이야.
그렇게 1년 4개월쯤,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주무관님은 내 사정을 잘 알아주셨는지 나를 계속 불러줬다. 나름 잘 봐주셨나보다.
코로나가 조금 잠잠해진 즈음에 나는 거처를 옮겼다. 더 이상 그 곳에 있을 명분도 없었거든.
그리고 병원도 옮기게 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두 번을 옮긴 끝에 지금 다니는 병원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처음 들은 말.
“이 정도 기간, 이 정도 용량의 약을 먹었다면 훨씬 좋아졌어야 해요.”
내가 그때까지 복용한 약은 전부 우울증에만 초점을 맞춘 약들이었다.
하지만, 내 증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새로운 진료가 시작됐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들을 쭉 읊어내야 했다.
듣는 선생님은 이게 말이 되냐는 표정이셨다.
그리고 격한 반응으로 말했다.
“미친 사람들이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못한 말을 대신해준 것 같아 오히려 시원했다.
처음 “PTSD”라는 말을 들었을 땐,
큰 사고나 큰 충격에만 생기는 병이라고 생각했다.
내 질환의 경중을 내 스스로도 따지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살아온 30여 년은 쇼크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일투성이였다.
여전히 증상은 오락가락한다.
약을 증량하기도, 감량하기도 한다.
죽고 싶을 때도 있고, 억지로라도 살아보고 싶을 때도 있다.
기억이 가끔 멈추고, 단어가 잘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다.
약을 줄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아예 단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지도 꽤 오래됐다.
어쩌면,
이 우울과 불안, 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평생을 함께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덕분이라고 해야할까. 양날의 검을 들고 오늘도 나는 말한다.
"다행이야, 이렇게 글을 쓰고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