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색깔의 알약들과 흑백의 꿈
1부 EP03. 두 번째 정신과
'내가 다니고 있는 병원인데 상담을 되게 잘해주셔. 의사 선생님이 경청을 잘하시고 말씀에도 진정성이 있었어. 약도 효과가 있고.'
신경과의 불면증 치료로는 우울증이 사라지지 않아 너무 힘들어하고 있을 때쯤, 지인 박이 나에게 자신이 다니는 병원을 추천해 주었다. 차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위치한 엄청 큰 대형 종합병원이었다. 큰 규모에 어울리게 주차장 또한 지상과 지하 두 군데나 보유하고 있었지만, 찾아오는 환자들은 훨씬 더 많아서 첫 방문날 주차에 애를 먹었다. 어찌어찌 주차를 하고 입구로 들어서니 문 앞에 상주하는 직원이 어느 과를 찾아왔냐고 물어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정신건강의학과에 왔다고 대답했다. 이 병원은 입구로 들어서는 모든 환자들에게 이 질문을 하는데, 나중에는 거리낌 없이 '정신건강의학과요.'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의사 선생님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모르지만, 눈빛이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첫 상담은 예외 없이 길었다. 의사 선생님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죽 말해보라고 하셨다. 때문에 나는 지난번 정신과에서 했던 이야기들을 또 해야 했다. 말을 하면서도 또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나만 힘든 게 아니라고 말하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불안했다. 다행히도 의사 선생님은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지 않고 주로 경청하는 느낌이었는데, 정말이지 지겨울 법도 한 내 이야기를 끝까지 진중하게 들어주셨다. 그리고 고심하신 끝에 조심스럽게 조언이나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 말들이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는 느낌을 주어서 상담을 받는 그 순간만은 조금이지만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상담이 끝나고 나서는 우울증 척도 분석을 위한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했다. 각종 검사지에는 질문이 정말 많았다. 문항이 백 개가 넘는 검사지도 있었다. 다 끝난 검사지를 간호사에게 전달하고 다음 예약을 잡은 후 병원에서 나왔다.
다음 상담. 의사 선생님께서 심리 검사 결과를 분석해 주셨다. 우울증 수치가 높게 나왔고, 수치가 높은 편이기 때문에 당분간 소량의 약을 복용해야 할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처음에는 약 반응을 보기 위해 일주일 정도로 짧게 처방을 하고, 부작용이 없으면 점차 기간을 늘려 이주, 한 달 간격으로 약을 처방받는다고 한다. 정신과 약은 같은 증상이라도 굉장히 많은 종류가 있다고 한다. 내게 처방한 약은 정신과 치료가 처음이니만큼 아주 약한 약들이라고 했다.
내가 먹는 약은 총 네 알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기분이 다운되는 것을 막아주는 약, 잠들었을 때 수면 유지를 도와주는 멜라토닌, 잠이 안 올 때 잠드는 것을 도와주는 약, 너무 불안할 때(미칠 것 같을 때) 진정시켜 주는 비상약. 이렇게 네 종류이다.
아침 약과 멜라토닌은 꼬박꼬박 먹고, 잠 오는 약과 비상약은 아주 가끔씩 너무 힘들 때만 먹는다. 진짜 효과가 있는지,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죽지 않을 만큼 버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죽지 않을 뿐, 죽고 싶다는 생각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약은 딱 그만큼만 도움을 준다.
그래도 이번에는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의사 선생님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내 삶에 공감해 주는 분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에 이렇게 지치고 힘든 거라고,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위안이 된다는 것을 의사 선생님은 알고 있을까.
약 덕분인지 시간의 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출근은 계속할 수 있었다. 우울과 불안이 극심한 날은 비상약을 먹는다. 비상약의 효과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죽지는 않았으니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요 이틀간은 연속 잠드는 약을 먹어서 하루 종일 비몽사몽이었다. 약을 먹으면 밤에 잠을 잘 자는 대신 아침에 일어날 때 너무 힘들다. 약을 안 먹으면...? 상상할 수 없다.
비상약을 안 먹어보기 위해 박의 집에 왔다.
"왔어?"
"또 왔어."
나는 박의 집 거실에 공기처럼 존재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이곳의 공기는 안정적이다. 박은 내가 집으로 찾아오는 것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저 옆에서 말동무가 되어주거나 간식거리를 같이 먹자고 한다. 박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너무 귀찮은 존재가 되면 안 되는데. 지금만, 지나갈 때까지만... 나는 색색깔의 알약을 먹고 기억나지 않는 흑백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