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필자는 2019년 중반 Virginia 주의 Fairfax로 이사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Fairfax는 Washington D.C. 근교이기에 (차로 약 30분 거리) 쇼핑몰이나 생활 편의시설도 잘 되어 있고, 가까운 거리에 잘 갖춰진 공원도 많으며, 한국인이 근처에 워낙 많아 한국 식당이나 마트도 말 그대로 널려 있다. 공교육의 질도 높고 학원이나 클럽활동 등 각종 사교육도 돈만 있다면 원하는대로 찾을 수 있다. 왜 다른 주에 사는 한국 사람들이 Virginia나 Maryland 주를 부러워하는 것인지 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기회만 되면 Texas Austin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사실 객관적으로 보자면 한국인들에게 Austin이 더 좋은 선택지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Austin애는 봄철만 되면 삼나무 (cedar) 알러지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고, 1년의 절반 가량을 최고 30도 후반 ~ 40도 초반까지 올라가는 강력한 더위에 고생해야 하며, 한국 식당이나 마켓 등 인프라도 그리 다양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또한 각종 관광지와 거리가 멀어서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놀러다니기도 쉽지 않다. (반면 동부나 서부는 보통 차로 몇시간만 가면 각종 유명 관광지나 국립공원 등을 방문할 수 있다)
이런데도 필자는 왜 2년 남짓 살았을 뿐인 Austin을 고향처럼 그리워하는 걸까? 이번 글에서는 이에 대해 간략히 다루고자 한다.
지난 두개의 글 (Baseball Inclusion, 두 번의 작별인사)에서 다룬 것처럼, 2017~19년 간 같이 운동한 Austin Braves 야구팀은 고향 친구같은 존재들이자 필자가 Austin을 그리워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들의 개방적이고 소탈한 성격 덕분일까, 야구 실력도 떨어지고 영어도 완벽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팀 내에서 한번도 겉도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필자도 벤치에 있거나 교체로 투입되더라도 항상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선발 라인업에 없는 날은 선발 출장하는 타자들을 위해 자청해서 배팅볼을 던져주기도 했다.
2019년 Virginia로의 이사 때문에 결국 시즌을 완주하지 못했고, Braves는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쳤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당연히 사진도 같이 찍지 못했고. 하지만 필자와 친했던 Andrew는 굳이 필자의 사진을 어디선가 구해서 준우승 기념 사진에 합성해 넣은 후에야 리그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렸다 (이 사진을 Facebook에서 보았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떠난지 2년이나 된 지금도 몇몇 팀원들과 메일로 문자로 서로 안부를 확인하고, 연말에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교환하곤 한다.
필자 가족이 다닌 L 교회는 지역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한인교회였지만 매주 예배 참석 인원이 수백명일 정도로 대형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교회 관계자와 신도들끼리 서로를 잘 알고 친밀히 교제할 수 있었다. 교회에 등록한지 한달도 안된 어느 날, 담임목사님 내외가 필자의 집에 심방을 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미국 생활을 축복해 주셨다. 한국에서 대형 교회에만 다니던 필자에게 담임목사가 일개 성도의 집에 심방을 온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담임목사님과는 취미도 비슷해서 매주 저녁에 테니스를 함께 쳤는데, 운동하면서 고민도 털어놓고 기도도 받은 것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필자 부부가 속했던 교회 구역 식구들과는 아직도 Zoom 으로 매월 얼굴을 보고 기도제목을 나누고 있다. 특히 구역장 M 집사 부부는 필자가 취업으로 마음고생 할 때나 신분 문제로 힘들어할 때나 늘 자기 일처럼 기도해주고 안부를 묻는 등 지금까지도 가깝게 연락을 주고 받고 있어, 어떨 때는 아직도 같이 Austin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앞의 두가지가 필자의 주관적인 이유였다면, 앞으로 다룰 세 가지 이유는 필자 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먼저 물가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는데, 2021년 기준으로 Fairfax와 Austin의 물가는 거의 30% 가까이 차이가 난다 (최근 Austin으로 Amazon 등 각종 기업들이 이전하여 집값이 올라 차이가 줄어든 것이 이 정도이다). 쉽게 말해 Fairfax에서 10만불 연 소득의 생활 수준이 Austin에서는 7만불 중반만 벌어도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동네 마켓만 가서 장을 보아도 분명 Austin에서 담던 것과 비슷하게 담았는데 영수증 금액의 앞자리수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똑같은 one bed apartment 월세도 Fairfax가 10~40%가량 비싸다.
아마 삶의 질까지 포함하면 실질적인 두 도시의 물가 차이는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Austin의 경우 집의 상당수가 Single home (단독주택)이라 집 크기도 크고 넓은 마당이 있는 경우가 많은 반면 Fairfax는 가격이 훨씬 비싼데도 면적이 좁은 Townhouse나 condo 등이 많기 때문이다. 만약 Fairfax의 물가를 산정했을 때 Single home 가격을 이용했다면 지금보다 차이가 훨씬 벌어졌을 것이다.
이사하자마자 가장 큰 차이를 느낀 것이 사람들의 온기였다. Austin에서는 모르는 사이라도 걷다가 눈이 마주치면 하다 못해 눈인사라도 건네는 분위기인 반면, Fairfax는 그냥 한국과 똑같이 눈을 내리깔고 지나간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2년간 Austin에 익숙해졌던 필자 부부에게 Fairfax의 냉랭한 분위기와 거리감 있는 인간관계는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아마 Fairfax로 바로 왔으면 '한국이랑 별 차이 없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미국 남부 주민들의 따뜻하고 친절한 태도를 'Southern Hospitality'라 칭하는데, 필자는 이 단어를 볼때마다 태민이의 학교 선생님인 Livi가 생각난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동양인 꼬마아이를 자기 아이처럼 사랑해주고 조금만 잘해도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던 모습, 방학이라 쉬고 싶을법도 한데 와이프에게 전화를 걸어 '일주일에 한번씩 태민이 공부를 봐줄게'라고 자발적으로 제안하던 모습 등등...
운전 매너도 빼놓을 수 없다. 앞차를 향한 거센 경적이나 급작스런 차선 변경 등은 Austin에선 쉽게 보기 어려운 반면, Fairfax에서는 그닥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서울의 운전 매너에 비교하면 이 동네는 양반이라 불평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HEB (Howard E. Butt)은 텍사스와 북부 멕시코에만 있는 local supermarket이다. 저렴하고 싱싱한 식재료와 local brand 상품들로 유명하며, 계산대의 직원들도 다들 친절하고 미소가 넘친다. 이곳에서만 구할 수 있던 Red Diamond 홍차는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입맛을 다시게 만드는데, 버지니아에도 다양한 브랜드가 있지만 아직 이정도로 입에 맞는 물건은 만나지 못했다.
최근 텍사스 눈사태가 났을 때 HEB에서 있었던 미담이 화제였다. 한 매장에서 전력 공급 제한으로 인해 매장 전체의 전원이 나갈 상황이 되자, '전원이 곧 꺼지니 카트의 물건은 그냥 들고 가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계산이 안되니 그대로 두고 가세요'가 아니라! 그 포스팅을 보면서 왜 Texan들이 HEB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Rudy's는 우리 가족이 제일 선호하던 Texas BBQ 체인이다. 2시간 거리의 San Antonio에 있는 놀이공원에 갔다 올 때마다 저녁으로 늘 먹곤 했다. 사실 Austin엔 워낙 유명한 BBQ 레스토랑이 많기에 Rudy's가 최고로 맛있다고 주장하긴 어렵지만, 활기 가득 찬 crew들의 고함과 두툼하게 썰어져 나오던 Brisket (양지머리), 그리고 컵 가득히 담아주던 creamed corn은 지금도 생각이 난다. 필자가 채식 식단으로 전환한지도 벌써 1년이 되어 가지만, 만약 Rudy's에 들르게 된다면 아마 그날은 봉인을 해제하는 날이 될 것이다.
또한 텍사스는 미국 영토의 가운데에 위치하기에, 그야말로 미국 내 모든 스타일의 버거를 맛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부의 Shake Shack과 Five Guys, 서부의 In-N-Out을 모두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미국 최고의 버거라고 일컬어지는 Hopdoddy도 Austin에서 찾아볼 수 있는 명물이다. 이들 외에도 Whataburger 등 로컬 체인 버거도 훌륭한 맛을 자랑한다.
글을 쓰다 보니 Austin에 대한 진한 그리움이 다시 몰려온다. 건물을 나설때 온 몸을 달구는 화끈한 그곳 특유의 공기, 해가 지면 박쥐 무리가 날아다니는 Congress Avenue Bridge, 필자가 2년간 통학하던 University of Texas at Austin 등등...지금이야 팬데믹으로 여행도 어렵고 신분 등 각종 문제들이 산적하여 여유가 없지만, 모든 것이 정리 되고 나면 꼭 한번 다시 찾아가서 그리운 얼굴들과 풍경을 다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