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과시하기

잡담이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방법

by 김영욱

과거에 잡담은 우아한 행위였다. 비록 내용이 저속하긴 했지만ㅡ대체로 좋은 점을 두고 잡담을 하지는 않으니까ㅡ그래도 잡담의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잡담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잡담을 늘어놓다가도 당사자가 나타나면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것, 이는 잡담하는 자의 높은 의식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런 고전적 잡담은 우리들끼리 나누는 은밀한 비밀이었고, 그래서 나누고 있는 잡담이 꼭 나를 가리키는 것 같아도 모른 체하며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고전적 잡담가들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에 나오는 제비처럼 예의를 갖춰 행동했다. 황금 왕자의 심장이 겉모습과는 달리 차가운 납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깜짝 놀랐음에도 황금 왕자 앞에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다.


고전적 잡담이라고 해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언제나 얼굴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기에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 우리는 지켜보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면 쉽게 태도를 바꾼다. 그때 우리는 하지 못했던 행동을 마음껏 한다. 가령 입을 가리지 않고 하품을 하며 은밀한 곳의 냄새를 맡아본다. 따라서 고전적 잡담가들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만 있었다면 당사자가 눈앞으로 걸어 들어오건 말건 잡담을 멈추지 않았을 거라고 주장할 수 있다. 옳은 말이다. 가면 축제가 한창인 베네치아에 있다면 우리는 당사자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잡담을 즐길 것이다. 가면을 쓴 채 잠자코 듣고 있던 당사자가 갑자기 잡담가의 가면을 낚아채는 위험을 감수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처럼 고전적 잡담가들 역시 익명의 이점을 누릴 때가 있었지만 그래도 정체가 드러나면 얼굴을 붉히거나 서둘러 도망침으로써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명백히 알렸다.


분명 고전적 잡담에도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더 나쁜 상황에 비하면 참아줄 만하다는 걸 지적하고 싶다. 더 나쁜 상황이란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하는 잡담이다. 오늘날의 잡담은 당사자가 없는 은밀한 곳이 아니라 당사자가 있는 곳에서 당당하게 행해진다.


오늘날의 잡담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고 공공연한 성격을 자랑으로 여기며 익명성에 기대 당사자에게 잡담이 알려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잡담하는 자신이 드러나게 되어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한 태도를 취한다. 뒤에서 욕하는 것보단 앞에서 욕하는 게 낫다는 윤리적 태도마저 과시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잡담은 악의적인 성격을 강조한 '악성'의 지위를 얻었다. '악플'이란 인터넷 용어가 더 친숙할 것이다.


악플의 가장 특이한 성격 중 하나는 부끄러움이 상실된 상태라는 데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웃는 남자>의 고전적 잡담가 앤보다 못하다. 적어도 앤은 자신의 냉혹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현대적 잡담가들은 자신이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정의 실현으로 당사자가 고통받는다면 그건 그들의 잘못과 나약을 증명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과거 공포정치 시절의 로베스피에르와 오늘날의 테러리스트를 모범으로 삼아 자유에는 폭력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처럼 그들은 마귀 앞에 선 그리스도가 된 듯이 군다. 당사자가 악플로 고소해도 당당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데, 이제 고소당하는 바람에 가정이 파탄에 이르렀다는 연민의 자격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핍박받는 그리스도가 된 듯이 군다.


인터넷의 모든 잡담가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맘카페' 회원을 예로 들 수 있다. 인터넷의 지역별 맘카페는 대체로 남성의 가입을 불허하는데, 그 이유로 카페에 남편과 시댁에 관한 잡담이 많다는 사실을 든다. 이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 곳에 들어갔다가 자신에 관한 잡담이 질펀하게 벌어지고 있다는 걸 목격해서 좋을 건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공간은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조정해 주는 균형자도 없이 남성의 참여조차 가로막으며 남편과 시댁에 대한 편향적 시선을 쌓아두는 그곳을 남녀 갈등의 본진이라 여기는 남성들이 대표적이다. 도덕주의자들도 당사자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은 그가 없는 곳에서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난 그 생각의 긍정적인 면에 동의하지만, 안타깝게도 인류 역사상ㅡ신과 성인을 제외하면ㅡ그런 일은 벌어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게 분명하기에 그 주장은 이상향에서나 실현 가능할 것이라는 점을 밝히고 싶다. 잡담의 대상을 밝히지 않은 채 사연을 늘어놓으며 서로를 위로하는 행위를 기분 나쁘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맘카페의 회원조차ㅡ일부러 밝히지 않는 한ㅡ잡담의 대상인 남자가 정확히 누구의 남편인지 알 방도가 없다. 이런 잡담은 여전히 고전적 형태를 띠며 현대적 잡담인 악플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에 반해 악플을 다는 현대적 잡담가와 그의 모욕을 받아내야 하는 현대적 당사자 사이엔 상당한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표현의 방식이다. 이 둘은 공개적 특성 탓에 종종 논박을 벌이는데, 이때 서로 간에 비슷한 분노가 일어난다. 브레히트가 썼듯,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일그러진 표정과 쉰 목소리만으로 둘을 똑같이 간주한다. 결국 피해자는 있되 가해자는 없으니 이 소란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 오물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는 오래된 속담은 참으로 진실을 말하고 있다. 오물과 싸우면 오물이 묻고, 결국 오물과 싸우던 잡담의 대상도 냄새를 피우게 된다. 현대적 잡담가들은 이제 그 냄새를 두고 잡담한다. 이런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아름다운 자연이 언제나 불순한 파괴의 성격을 지니고 있듯 정의로운 우리들 또한 셰익스피어의 모든 인간 군상들처럼 다양한 결점을 지니지 않을 수 없는바, 잡담가들은 그를 놓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현대적 잡담가와의 다툼으로 이득을 볼 수 없다면 근대 예술이 그로테스크한 추를 미의 한 양식으로 받아들이며 고대 예술에서 분리되었듯이, 에드거 앨런 포가 공포 소설로 사람들을 유혹했듯이, 악플을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비옥한 원천으로 간주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추함과 악행에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을 넘어 그를 함께 즐기는 것이다. 공격적 행동과 따귀, 주먹질을 찬양했던 20세기 미래주의 작가들처럼 말이다.


섣불리 과격한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변화는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빅토르 위고가 <크롬웰> 서문에서 추를 찬양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영화, 이른바 '19금' 영화는 쳐다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래주의 작가들 역시 다른 양식으로 회귀했고 그중 일부는 파시즘을 찬양하다가 막을 내렸다. 그럼 도덕주의자들처럼 고결한 방식을 택해야 할까? 사르트르는 <말>에서 어린 시절에 어른들을 존경했던 이유가 어른들에게서 나는 입냄새와 외모의 불결함 때문이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불쾌함까지 포용할 수 있어야 참된 선이라고 생각했다. 자못 숭고한 데가 있지만 대중에게 이런 태도를 권하기는 매우 어렵다.


서로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오래된 부부들의 방법을 택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일 것이다. 이들은 비어 있는 배처럼 행동하여 갈등을 피한다. 바람에 날아와 부딪친 나뭇가지와는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관계 전문가들이 다툼이 일 것 같으면 상대방이 없는 듯 생각하라고 제안하는 이유는 그것이 최고의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평범한 인간에게 권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얼굴을 드러내고도, 혹은 상대방이 있건 말건 거리낌 없이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물론 남들이 보건 말건 길거리에서 소변을 누거나 아무도 없는데 혼자 괴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다. 그런 인물들은 정신병리학자의 손에 맡겨 두도록 하자.


과거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잡담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이런 방식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방식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엔 출연자와 시청자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엔 그를 기술적 결함으로 여겼으나 이젠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기술, 퇴행적 발전이 되었다. 오늘날 잡담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면 일방적으로 말을 떠들던 20세기 초의 고전적 텔레비전 시대, 혹은 신을 두고 잡담을 해도ㅡ그리스 신화를 보라ㅡ웬만해선ㅡ소크라테스를 보라ㅡ불경죄로 다스리지 않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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