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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인사이트 10... 사랑

신이 권하신 사랑 그리고 흔들리는 인간의 사랑

by 소망

진리인 사랑을 말하기에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말씀을 들으며 사랑에 대해 깊이 사유했습니다. 사랑에 대해 무지하여 착각하며 살았던 저를 반성했고 순전한 사랑에 대해 깨우친 바를 글로 쓰려 합니다. 스스로 깨우쳐 가는 과정의 생각일 뿐이라 견해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읽으시는 님들의 이해를 구하며 용기 내어 정리해 봅니다.




사랑이라 착각하며 살았던 세월


우울증을 앓은 후, 초감정을 정리하며 치유의 길에 들어섰을 때쯤 어느 봄날, 늦은 아점을 먹으며 남편께 고백처럼 말했다.


"난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어."


순간 남편은

'그럼 내가 몇십 년 속아 산 거야?'

뜨아~ 하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았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난 변명처럼 말했다.

"자신도 사랑할 줄 몰랐던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었겠어. 미안해."



그랬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 존재하는 세상은 나의 존재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기 어렵다. 내가 그랬다.


남들 다 쓰는 립서비스 같은 사랑 말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한테 아주 오랫동안 진정한 사랑을 주지 못했다.


나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지면서 사랑에 대한 무지와 경솔함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진리인 사랑은 절대적이며 변함없는 것이었다.


'사랑은 새털처럼 가볍고 보드라운 거야.

그러나 가치는 묵직하고 엄격해서 절대 훼손되어서는 안 될 덕목이라 생각되었다.


숱하게 경솔히 뱉어냈던 사랑이란 말이 가슴을 짓눌렀다.

사랑에 대한 성경 말씀을 듣고 묵상하며 생각이 변했다. 변화한 생각은 행동을 변화시켰고 자잘한 실천으로 이어지면서 가정을 변화시키고 가족의 유대를 강화시켜 주었다. 실천하면서 나와 타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더불어 존중과 인내가 필요함도 알았다. 나는 사랑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면서 사랑이라 말하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사랑을 배우는 과정을 거쳐


고통체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알 수도, 할 수도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 중심은 나를 아는 거였다. 나의 고통체와 결핍된 상황을 알고 치유해야 했다. 어린 시절 엄마를 잃고 정서적 고립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던 나를 바라보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지금 나는 1년 5개월에 걸쳐 900편의 글을 썼다. 나의 모습을 찾아 치유하고 진정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글은 시간 따라 변하는 나를 가장 잘 보여준다. 늘 외부로 눈 돌리며 타인의 시선을 그리워했던 나. 그들의 인정과 사랑만을 갈구했던 나. 그럴수록 나의 외로움은 더 짙어가고 실망과 상처로 얼룩졌다. 그런 가운데 번아웃을 맞이했다.

고작 나 자신을 사랑하고자 하는 일이었는데 타인에게 돌렸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기까지 참 오랜 시간과 힘과 노력이 필요했다.


지금? 나는 나를 사랑한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이란


가수 심수봉 님은 자신이 부른 노래 '백만 송이 장미'에서 알려 주었다. 생명을 다하고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주기만 할 때 진실한 사랑의 장미가 핀다고. 백만 송이를 피워내야만 제 별나라로 갈 수 있다고. 이는 분명 신이 이 땅에 보낸 천사에게 내린 벌임에 틀림없다.


100년을 사는 인간은 하루같이 진실한 사랑을 해도 3만 6천5백 송이밖에 피우지 못한다.


24시간 ×365일 ×100년=876,000시간


한 시간마다 사랑하면 얼추 가까워지려나.

진실한 사랑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60년 동안 한 송이도 못 피워낸 1인이 나다.

빛과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나는 분명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타인도 사랑한다. 그러나 나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다 줄 수 있는 사랑인가?


인간의 사랑이란 땅에 뿌리를 둔 나무, 혹은 가벼운 갈대, 떨어져 나뒹구는 나뭇잎에 비유하련다. 뿌리가 깊이 내리건 얕게 내리건 바람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자리를 옮기는 인간의 마음을 닮은 것이 인간의 사랑이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


진짜 사랑은 변함없는 거라 믿었다. 세상엔 하나님이 계시고 내 곁에도 늘 계시고 내 안에도 계시니 하나님만 믿고 그 뜻에 순종하면 사랑은 세상에 넘쳐흐른다 믿었다. 그런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외로움이 다시 찾아왔다. 기를 쓰고 고독이라 외치며 부인하고 싶었고, 나와의 교제. 신과의 교제 속 고독이라 우겼다.


사랑은 오래 참아야만 한다니 인내하고자 했고 온유하니 온유하고자 노력했다. 마음은 사랑할 준비가 다 되어있고 사랑받을 준비도 끝났다. 그런데 왜 가슴에 휑한 바람이 부는 걸까? 가슴에 공허함이 느껴졌다.


불현듯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건가?' '나는 사랑받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올라왔다. '사람들 사는 모습들이 비슷하고 미워하는 사람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도 없는데 왜 이럴까? 그럭저럭 안정되어 잘 살고 있는데,

사랑하고 사랑받아 느끼는 기쁨은 없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인간은 진짜 외로운 존재인가? 그래서 그런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외로움을 느끼며 태어나는 인간은 없다. 사랑받지 못한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이다. 삶 속에서 충분히 사랑받는 사람은 인간이 외로운 존재라고 말하지 않는다.


부모님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는 어린 시절에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사람은 외로움을 잘 느끼지 않는다. 마음근력 덕분이다. 잠시잠깐 단절되는 사랑에는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단절이 길었던 사람은 짧은 단절에도 외로움을 많이 느낀다.


지독히 외로움을 느끼고 살아온 나는 늘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고 말하며 나의 외로움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랑을 받지 못해 외롭다는 현실에 대해서는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일반적 정의로 합리화를 시켰다. 순전히 자위적 행동이었다.


인간관계 속에서 웃고 즐길 때, 관심과 인정 ㅡ잠시의 립서비스 같은 사랑일지라도ㅡ속에 있을 때 나는 외롭지 않았다.


인간이 외로운 존재이긴 하나 외롭다는 건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이고 사랑 안에서는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말은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이 세상에서 스스로 위로하는 말일뿐이다.


외로움에 절어 홀로 방황하며 사유에 빠진 숱한 철학자들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사랑하지 않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인 듯하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철학자가 되라고 한 적이 없다. 사랑 속에 거하는 외로운 철학자도, 사람도 없다.

단지 사랑의 결핍 또는 단절을 겪는 인간만이 외로울 뿐이다.



사랑하라는 신의 뜻


성육신인 예수님은 인간의 감성을 경험했다. 분명 외로움도 느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믿음과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진리로 못 박아 사랑을 강조하셨다. 그것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빛이신 하나님은 분명 나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그 안에 살고 있는 것도 맞다.


사랑이 빈 듯한 공허함에 내 사랑은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를 돌아보았다. 하나님과 나, 또 다른 타인들을 사랑한다.

그런데, 나는 과연 사랑을 하는가? 받는가?

다시 또 같은 물음에서 맴돌았다.


그러다 나만의 결론을 지어냈다.


by 소망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관계로 가득 차있지만, 인간이라면 어느 누구든 시간 속 고립을 경험한다.


시간은 관계 속에서 흘러간다. 시간 속

고립은 관계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랑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관계의 단절은 사랑의 단절이다. 고로 사람은 삶 속에서 사랑의 단절을 경험한다.



그리고 사랑은 쌍방의 소통이어야 가치가 있다. 변함없이 존재하는 신의 사랑에도 나 자신이 신과 잇대어져 있어 사랑해야만 마음이 충만하다. 신에 대한 믿음은 신과의 쌍방 사랑이다.


'서로'는 바로 쌍방이다. 인간에게도 쌍방의 사랑을 명령하셨다.


아픈 사랑도 쌍방이라 사랑이다. 그러나 일방의 사랑이란 신이 뜻하는 사랑이 아니다.


한쪽은 무관심인 일방의 사랑은 외로움이다.


사랑은 고여서 묵히는 가치도 아니다. 드러날 때 꽃처럼 피고 향기가 번져가는 것이다.


태양빛이 없고, 물과 토양이 없이 피는 꽃은 없다. 사랑은 쌍방의 관계 속에서 피는 꽃이다.


그래서 사랑은 표현의 뜻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을 통해 드러나고 표현되어야 하는 사랑이다. 그래서 인간이셨던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다.


세상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빛과 사랑이 흘러넘쳐도 인간인 누군가 퍼내어 드러내야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가득한 사랑도 우리에 의해 드러나야 진정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세상 속, 흔들리고 단절되는 사랑


주기만 한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온다고 다 주는 건 아닌 게 인간의 사랑인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 아닌 사랑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사는 것일 수 있다.


사랑은 진짜 어려운 것인가?

사랑하는 마음을 누구에게나 가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나님이 부어주셔야 퍼댈 수 있고 내 마음 안에 사랑인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사랑할 수 없다.


흔들리는 인간의 변함없는 사랑이란 없다.

성직자는 하나님과 사랑했다. 마음이 흔들리는 인간과의 사랑보다 불변의 사랑이신 하나님을 택한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에 굳건히 변함없는 사랑이 없기에 공허함이 생기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흔들리는 마음과 그로 인한 결핍을 아셨기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니 수시로 빈 사랑을 채우라고 많은 관계와 인연을 맺게 하셨다.


여기서 관계란, 신과 나의 관계뿐 아니라 나와 타인, 다양한 생물과의 관계 등을 말한다. 애견과 애묘와의 관계, 다육식물과의 관계ㅡ어떠한 관계든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지면 마음은 충만하다. 쌍방의 사랑이다.


외로움은 사랑의 단절로 느끼는 감정이건만 나는 중요한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시간 속 고립을 자처했었다. 흔들리는 마음에 의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흔들리기에 인간이고 잠깐씩의 단절로 영영 단절시킨다면 나는 성직자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의 외로움은 자처한 고립이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즐거울 때, 사랑하고 받을 때 꽃처럼 피고 행복하다.


나의 인연은 많다. A도 있고 B도 있고 C도 있다. A의 사랑이 잠깐 단절되었다면 B와 사랑하면 되고, B의 사랑이 단절되었다면 C와 사랑하면 된다. 사랑도 흔들리고 돌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고립된 외로움이 곧 죽음이다. 고립을 피해 밖으로 나가 관계 속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서로 사랑하세요


곁에 있는 사람들과 먼저 사랑하세요.

사랑은 표현입니다. 인간을 통해 드러나야 빛나는 가치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먼 나라의 누군가와 사랑할 수 없잖아요. 사랑은 쌍방일 때 빛나고 외로운 존재라는 그늘을 싹 거두어갑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사랑하면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죠. 그와의 사랑은 오래 참고 변함없이 바라고 믿고 온유해야 한다고 하죠. 힘든 사랑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픈 사랑도 사랑이지만,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기르는 강아지도 관심을 주면 꼬리 칩니다. 키우는 꽃도 물 주고 바라보면 활짝 웃습니다. 모두 관심입니다.


사랑할 사람과 사랑하세요. 우리는 각자 소중하고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입니다. 절대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 닿지 않을 사랑을 소모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 길지 않은 세상의 삶에서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다 가야 합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할 테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제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아 그의 가슴에 공허와 외로움이 사라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도 저를 사랑해 주겠지요.



아가서 3장에서 알려줍니다. 사랑은 이리 인내하며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고요.


'여인은 밤마다 침상에서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으나 찾지 못했어요. 침상에서 일어나 그 밤에 마음 깊이 사랑하는 그를 찾아 성의 광장찾아 헤매었지요.'



사랑은 적극적으로 찾고, 바라고, 믿고, 참고, 붙들고 지켜, 함께 하는 거랍니다.


제 외로움과 공허함의 이유를 님들도 아시겠죠?


단, 인간인 제 생각은요...

사랑이 변함없이 오래 참고, 바라고, 믿는 거라지만 지금은 무관심한 사람에게 오래 참는 사랑은 소모일 뿐이라 생각해요.

그래서 신께서도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신 겁니다. 서로서로.


그 귀한 의미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혼자만의 사랑은 고독도 아닌 고립된 외로움일 뿐입니다.


당신은 가슴에 외로움이 없나요? 가슴이 휑하지 않나요?


사랑으로 충만할 때 외로움의 자리는 없습니다. 휑할 공간도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찾아 구해서라도...





논리적 서술이 부족해 장황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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