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주차] 에너지 듬뿍 초콜릿 칩 쿠키

음식임신일기

by 솜대리




초콜릿 칩 쿠키를 구웠다. 먹는 것도 장할 지경인데 직접 굽다니, 스스로가 장하게 느껴졌다. 원래는 요리를 좋아하지만 입덧이 시작되면서는 부엌 출입 조차 못하고 있었다. 3주 전 살기 위해 이 악물고 만들었던 유부초밥을(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 참조) 제외하면 근 한 달 반 만의 요리다. 갑자기 쿠키를 굽는다고 분주해진 나를 보며 남편도 드디어 나아지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아직도 음식 냄새가 힘든 상황이라 요리는 엄두도 안 내고 있었는데, 우연히 발견한 초콜릿 칩이 계기가 되었다. 하루 종일 누워있었더니 등이 배겨서 운동삼아 슬슬 부엌 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찬장 구석에서 밸런타인데이용으로 사놓은 1kg짜리 초콜릿 칩을 발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알게 되어 손도 안 대고 그대로 넣어두고 있었다. 방산시장까지 야심 차게 가서 사 온 건데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펴보니 마침 초콜릿 칩 쿠키에 필요한 다른 재료들도 모두 있었다. 쿠키라면 만드는 것도 어렵지 않고, 냄새도 역하지 않으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힘들면 남편에게 쿠키 만들기를 떠넘길 작정이었는데 다행히도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싫어하는 남편은 간발의 차로 요리 대신 갓 구운 초콜릿 칩 쿠키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날 완성한 초콜릿 칩 쿠키


쿠키는 베이킹 중에도 간단한 축에 속한다. 빵처럼 발효시킬 필요도, 케이크처럼 머랭(거품 낸 계란 흰자)을 칠 필요도 없다. 밀가루, 계란, 버터, 설탕 등을 섞어 굽기만 하면 끝이다. 덕분에 쿠키는 일일 베이킹 수업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 초코칩 쿠키는 기본 쿠키에 초콜릿 칩만 넣으면 된다. (물론 레시피에 따라 다르다.) 조리법이 어렵지도, 들어가는 재료가 복잡하지도 않지만 의외로 역사는 길지 않다. 초콜릿 칩 쿠키는 1938년 미국 매사추세츠의 한식당에서 개발되었다. 원래도 맛집으로 유명했던 이 식당은 네슬레 초콜릿바를 쿠키 도우에 작게 부숴넣어 초콜릿 칩 쿠키를 만들었다. 이 레시피는 식당 주인의 요리책에 실려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곧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일설에 의하면 초콜릿 칩 쿠키가 미국 전역에서 인기는 세계 2차 대전과도 관련이 있다. 당시 매사추세츠 지역에서는 이 쿠키가 아주 유행해서, 많은 여성들이 전쟁에 나간 남편이나 아들에게 이 쿠키를 보냈는데, 이를 맛 본 다른 지역 병사들도 자신의 집에도 이 쿠키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면서 이 쿠키가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네슬레에서는 원조 쿠키를 만든 식당, Toll house의 이름을 딴 초콜릿 칩 쿠키를 출시하기도 했다.


이야기의 정확한 사실여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초콜릿 칩 쿠키가 군인들에게 인기를 끌만한 음식인 것은 맞다. 신체 활동이 많은 군인들은 달고 열량이 높은 음식이 필요한 순간이 많다. 쿠키의 기본적인 단맛에 초콜릿의 맛과 카페인이 어우러지는 초콜릿 칩 쿠키는 최적의 음식일 수밖에 없다. 당이 떨어졌을 때 초콜릿 칩 쿠키를 한 입 베어 물면, 목으로 넘기는 순간 에너지가 솟는 느낌이 난다.


나도 초콜릿 칩 쿠키의 기운을 받은 걸까, 이 날부터 점차 회복세에 돌입하고 있다. 일단 이 날 초콜릿 칩 쿠키와 우유를 먹는 데 성공했다. 냄새 때문이든 배탈 때문이든 무슨 이유에서건 잘 못 먹고 있었다. 하지만 웬일로 갓 구운 초콜릿 칩 쿠키의 향이 향기롭게 다가왔다. 한 입 베어 문 따뜻한 초콜릿 칩 쿠키는 부드럽게 부서졌고, 부서지는 쿠키 사이사이를 따뜻하게 녹아난 초콜릿이 메웠다. 목이 먹먹할 즈음 찬 우유를 곁들이니 금상천화였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는 쿠키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 주고, 쿠키 속 설탕과 초콜릿 칩의 단 맛도 깔끔하게 씻어 내렸다. 질리지 않고 큼지막한 쿠키 두 개를 먹어치웠다. 뭐라도 먹으면 감사한 나날들이었는데, 놀라운 발전이었다.


한 카페의 초콜릿 칩 쿠키. 케이크 같은 식감과 울긋불긋한 색깔이 독특하다. 시간이 지나며 초콜릿 칩 쿠키도 다양해졌다.


한 번 잘 먹고 나니 먹는데 대한 부담이 크게 줄었다. 다른 음식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아직도 냄새에 예민하고 금방 체하긴 하지만, 한 입 억지로 먹고 체하던 예전보단 낫다. 드디어 입덧도 끝나가는 모양이다. 보통 입덧은 12주가 되면 나아지기 시작하고, 15주 정도 되면 거의 낫는다고는 하나 그것도 개인차가 있다. 심한 사람은 5~6개월까지 힘들다고 했는데, 입덧을 한참 할 때는 내가 그 심한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고 언제 끝날지도 모르니 갑갑했다. 하지만 지금은 힘들긴 해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니 한결 힘이 난다.


몸 상태도 나아지고 있다. '임신 초기 지속되는 원인 불명의 출혈' 때문에 병가를 냈었는데, 무사히 나아서 회사에 복귀했다. 병가 기간에는 이상하게 피곤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잤는데, 그 끝없는 피곤함도 많이 나아졌다. 회사 생활이 가능할까 걱정했었는데, 점심시간 잠깐의 낮잠으로 어떻게든 해내고 있다.


영어권 국가에서는 임신 기간을 1~3기로 나눈다. 시기에 따라 특징이 있는데, 착상~13주까지인 1기(First Trimester)에는 입덧이 있고 몸상태가 불안정하며, 2기에 접어들면 안정되기 시작한다. 나는 12주이니 마침 1기가 끝나가는 시점이다.


이런 걸 보면 나도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 평범한 사람인 모양이다. 평소엔 이 사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다른 모두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나는 특별한 존재인양 생각하고, 다들 괜찮은데 나만 힘들거나 이상한 것처럼 느껴질 때 나도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하지만 시기에 맞추어 거짓말처럼 입덧이 나아지고, 초콜릿 칩 쿠키로 갑자기 기운이 돌면서, 나도 그저 보통의 사람일 뿐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망각해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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