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임신일기
과일이 당기면 딸이라던데 최근까지만 해도 나는 좀처럼 과일이 당기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던 수박도 조금만 먹으면 속이 차갑고 소화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여드름까지 나기 시작하면서 나는 뱃속의 아이가 아들인 줄 알았다. (아들인 경우 여드름이 많이 난다고 한다.) 하지만 결과는 딸이었다. 아무리 옛날 얘기라고 해도 과일과 아이 성별에 대한 얘기는 다들 정설처럼 얘기했기 때문에, 성별을 들었을 때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6월이 가까워지면서 갑자기 복숭아가 못 견디게 먹고 싶어 졌다. 웬만한 과일은 사시사철 구할 수 있으니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보았지만, 복숭아는 없었다. 같은 핵과류(가운데 단단한 씨앗이 하나 들은 과일)인 자두나 살구라도 있었으면 했는데 이마저 없었다. 알고 보니 복숭아는 요즘에는 드물게,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극조생종(아주 일찍 수확하는 품종)도 빨라야 6월 말에 수확을 한다고 했다. 세상에, 6월 말이라니. 임산부에게 먹고 싶은 음식을 그렇게 오래 참으라니. 너무 가혹했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복숭아를 파는 곳이 있나 매일 같이 인터넷을 검색했다. 애 닳은 임산부의 모습에 가족들도 함께 인터넷 검색을 하고 복숭아 농장에 전화하는 등 눈에 불을 켜고 복숭아를 찾았다.
첫 복숭아를 먹은 건 그로부터 한 달도 더 지나서였다. 역시 급하게 군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우리가 농장에 전화한다고 복숭아가 빨리 익지는 않았다. 가장 빠른 복숭아도 7월이 다 되어서야 나왔다. 수확을 하자마자 농장에서 직접 복숭아를 배송받았지만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빠르지도 않았다. 마트의 제철 과일 조달 속도는 정말 빨랐다.
그래도 마트에서 산 것과 농장에서 직배송한 것은 달랐다. 복숭아는 따고 금세 먹어야 하는 과일이다. 원체 과육이 부드러워 잘 상하는 데다, 수확을 하고 나면 과일을 노화시키는 호르몬인 에틸렌이 급격히 생성된다. 그러다 보니 마트에 도달하기까지 이미 며칠이 지난 마트 복숭아와 농장에서 따서 바로 보낸 복숭아는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농장 직배송 복숭아의 또 다른 장점은 품종을 알고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마트에서는 대부분 '복숭아'라는 이름으로만 붙여 팔지만 사실 우리나라에는 수 백 여종의 복숭아가 있다. 각 종류마다 맛도 식감도 다르다. 농장에서 직접 주문하면 복숭아의 품종과 특징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복숭아를 비교해 먹어보고, 좋아하는 복숭아 품종을 알아내는 것도 복숭아를 먹는 또 다른 재미다.
복숭아는 여름 내내 나오지만 각 품종이 나오는 기간은 통상 1~2주 정도로 매우 짧다. 좋아하는 품종을 오래 두고 먹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매번 다른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래서 요새는 여름 내내 여러 가지 다른 품종의 복숭아를 배달해주는 복숭아 구독 서비스도 있을 정도다. 사전 예약을 받길래 고민을 하다가, 그걸 신청하면 남편과 나 두 식구가 한 여름 내내 복숭아만 먹어야 할 것 같아 신청하지는 않았다. 고민하다 신청을 안 했지만 금세 매진이 된 걸 보며 아쉬웠는데 엄마가 2주마다 복숭아를 주문해 주었다. 복숭아 구독 서비스를 한 것과 마찬가지가 되었다. 엄마 덕에 여름 내내 복숭아를 잘 먹고 있다.
남편도 복숭아를 먹는데 일조했다. 복숭아는 말랑말랑해서 깎으면 손이 과즙으로 흠뻑 젖어버리는 데다, 껍질도 금방 날벌레가 꼬여서 바로 내다 버려야 한다. 한 번 먹기가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 여름엔 '복숭아 먹자' 한 마디면 다 되었다. 남편이 알아서 다 해줬기 때문이다. 우리 집 업무 분장 상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임신 후 나와 남편 간 업무 구분이 흐릿해졌다.
아가 덕에 전에 없던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