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그녀와 자주 만난다. 우리 사이에는 분명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경계가 있다. 서로를 잘 알고 있지만, 그만큼 잘 모르는 것도 많다. 우리는 언제나 친구처럼 대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안다. 그리고 그걸 애써 숨기며 나는 오늘도 그녀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는다.
“오늘 뭐 했어?”
그녀의 질문에 나는 대충 대답한다. “그냥… 별거 없었어. 집에서 쉬고 나왔지.”
늘 똑같은 대화. 나는 항상 비슷한 답을 내놓고, 그녀는 그걸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이런 질문조차 나에게는 마음을 흔드는 일이다. 그녀가 내 일상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내 속마음이 드러날까 겁이 나지만, 동시에 그게 기분 좋다. 하지만 그 감정이 깊어지지 않도록 나는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는다.
‘우린 사랑하지 말자. 그렇게 해야 오래 볼 수 있으니까.’
이 말은 내가 나에게 가장 자주 하는 다짐이다. 우리는 분명 서로 애틋하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감정을 인정하게 되면, 결국 헤어짐이라는 불가피한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걸 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애매한 이 관계를 유지하기로 한 거다. 친구 같으면서도 그 이상은 아닌, 그런 관계.
그녀가 아플 때가 있었다. 나는 집에 남아 있던 약을 챙겨서 건넸다. “여기. 그냥 집에 있던 거야. 필요하면 써.”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쏟고 있다는 게 들키지 않도록, 그저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속으로는 신경이 쓰인다. 그녀가 괜찮을까, 약이 도움이 될까. 그런 걱정들이 마음속에서 나도 모르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감정을 깊이 파고들면 안 된다. 그러다 보면 사랑이 될 테니까.
“우리 그냥 이대로 지내자.”
그녀에게 이 말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늘 이렇게 되뇐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다치지 않게. 사랑하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가끔 사람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는 언제 사귈 거야?” 그럴 때면 나는 그냥 웃어넘긴다. “아니야, 그런 거.” 그리고 그 순간마다 나는 그녀의 반응을 살핀다. 혹시나 그녀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만 혼자 이런 감정을 숨기고 있는 걸까. 내가 먼저 솔직해지면, 모든 것이 변해버릴까 두렵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있을 때, 내 마음 한구석에서 뜨거운 질투가 피어오른다.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감정을 억누른다. 그냥 넘기자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스스로 다독인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나도 모르게 기분이 나빠진다. 그런데, 그게 나쁜 마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 감정이 아플 뿐이다.
‘우린 사랑하지 말자. 그래야 나중에 덜 아플 거야.’
이 결심은 나를 지키기 위한 방어막과도 같다.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는 헤어져야 할 때가 오고, 그때 나는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이대로 오래가는 게 낫다고 믿고 있다. 사랑하지 않는 것만이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친구 아닌 친구.”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애매하게 다가가고, 그 경계를 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 경계 안에서 나는 내 마음을 감춘다. 하지만 속으로는 그녀가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려움에 빠진다. 그 경계를 넘으면 모든 것이 망가질 것만 같아서.
그리고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간다. 나는 여전히 그녀 옆에 있지만,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서로에게 조금씩 더 끌리지만, 우리는 결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그런 관계가 지금은 편한 것 같지만, 때로는 나 자신이 속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제까지 이런 마음을 숨기며 지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렇게 다짐한다.
사랑하지 말자. 그래야 오래 볼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