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최선의 선택?
H주간보호센터장의 회신은 기대한 것이기는 했으나 한편으로는 뜻밖이었다.
규모가 작은 그곳의 필수인력충원 차원에서 4월초에 채용했던 요양보호사가 부득이한 사유로 그만두게 된것같았다. 후임으로 나에게 다시 채용의사를 밝히며, 센터장은 2주후인 5월부터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이미 생산직 두곳의 최종 선택권을 가지고 있던 나는 센터장의 물음에 몹시 흔들렸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최종 취업을 원했고, 1지망은 사회복지사였으나 2지망 혹은 차선책인 요양보호사로 취업할 현실적인 기회가, 그것도 내가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받은 선망의 대상이었던 바로 그 주간보호센터라면....그렇다면 한번 해볼만 하지 않을까?
나는 당장이라도 오케이하고 싶었으나 월급을 더 후하게 쳐주겠다던 생산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갈등을 시작했다.
그동안 이런 일은 없었다, 무려 세 군데 업체에서 나를 써주겠다고 하다니!
그러니 나로서는 혼란스러움과 망설임과 갈등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생산직의 출근날짜까지도 최소 4~5일씩은 남아있었고, 주간보호센터는 무려 2주후인 5월부터 출근하라니 어떤 선택이 내게 가장 이롭고 지혜로운 것이 될지 며칠동안 거의 머리를 쥐어뜯을 만큼 고민하고 계산기를 두드리고 두드리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가장 단순한 조건으로 O ✕를 쳐가며 최종선택을 하기로 했다.
먼저, 월급면에서 생산직이 동일 업무시간대비 시급이 높다.
노동강도면에서는 비슷할 것이다.
출퇴근거리는 주간보호센터가 집에서 걸어서도 15분, 차로는 5분이내...
월급을 많이 받는 생산직은 그만큼 거리가 멀어서 기름값을 생각하면 결국 비슷할 것이다.
내가 선망羨望하던 주간보호센터의 경우, 사회복지사가 아닌 요양보호사 일을 해야 하지만 내 어머니가 이용하는 시설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만큼, 또 내어머니를 수발해 본 경험이 있는 만큼, 한번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같았다.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자 마음이 아주 편해졌다. 그래, 이제 내 할일을 제대로 찾은 것같다.
그리고 다음날, 이미 채용이 결정되었던 생산직 업체들에 전화를 걸어 입사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2주동안 나는 부담감 없이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출근을 앞둔 마지막 금요일에는 미리 H주간보호센터에 가서 인수인계를 받고 이용자인 어르신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5월2일 첫날, 시간에 맞춰 출근했다.
그런데, 요양보호사가 나까지 총 3명인데, 9시와 10시로 출근시간이 나뉘어 있었다. 9시출근자 두 사람중, 한사람은 8시반쯤 미리 출근하여 센터의 상황을 스탠바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이용자들의 집에 들러 센터까지 차량으로 이동시키는 송영업무를 한다. 그리고 10시에 출근하는 사람은 그냥 그대로 센터일정을 함께하는 대신 저녁에 혼자 남아 센터 전체를 청소하고 오후7시에 퇴근하는 것이다. 9시출근자는 오후6시퇴근.
뜻밖에도 나에게 첫날부터 한달동안 오전 10시 출근-오후7시퇴근 순번을 정해준 것이다.
면접시에는 10시출근자가 오후에 혼자 남아 드넓은 센터내부 청소를 도맡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출근을 하고 나자 비로소 그렇게 얘기하며, 혼자서 해야 할 청소의 세부내용을 알려주었다. 청소는 어르신들이 하루종일 생활하는 공간 전체 외에도 주방(점심저녁 식사가 제공되는데, 저녁식사 후 마무리를 하지 않고 가버리는 주방담당자 대신 남은 설거지와 뒷정리를 해야 한다)과 화장실 쓰레기통비우기 등이 포함되었다. 오후 6시 전후 모든 이용자가 빠져나간 뒤 주방마무리부터 끝내고 청소기를 돌리거나 물걸레질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온몸에 땀이 났다. 거의 한시간 정도가 걸려야 끝이 났다. 빨리 끝내면 빨리 갈수도 있으나 아무리 빨라도 한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는 솔직히,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신입이라 일부러 청소를 시키는 것인가 싶기도 했고 하기 싫은 일을 먼저 시키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물론 처음부터 송영을 혼자 다닐 수는 없다 생각해서 정한 일인지도 모르겠으나 이렇게 처음부터 '고생스럽다' 는 인식을 갖게 되면 더 빨리 지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적어도 청소는 같이 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회복지사도 센터장도 나머지 두명의 요양보호사도 오후에도 송영을 나간다. 그러면 남은 것은 간호사였다.
간호사도 나와 같은 날 일을 시작한 신참이었지만 그녀는 청소를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거나 사무실에서 자기 일이 있다는듯 남아있는 것을 보았다...
출근 이틀째, 물론 첫날부터, 아니 사실은 정식 출근전 인수인계차 들렀던 날부터 의아하게 생각되던 것이기는 하지만, 센터장(대략 40대로 보이는 젊은 간호사출신이라는 여자)의 태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어르신들에게 스스럼없이, 격의없이, 친밀하게 다가간다는 의미인지 마구마구 반말을 해댔다. 말을 길게 하다 보면 말이 조금씩 짧아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녀는 대체로 그런식으로 약간 어리광부리듯 코맹맹이소리도 섞어가며, 그렇게 징징대듯이 응석부리듯이 어르신들에게 엉겨들었다.
뭐, 보기에 따라서는, 참 스스럼없이 잘 하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어쩌면 나는 이미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아줌마가 되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 모습이 마냥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대강 말꼬리 잘라먹어가며 말하기가 습관이 되었기때문인지, 요양보호사들에게도 찍찍- 반말을 해댔다. 뭐, 아주 오래 같이 일하다 보니 마음이 잘 맞고 다 이해하는 사이가 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센터는 생긴지 2년째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센터장이 늘 아예 반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씩 존대말도 하는데 존대와 반말의 비율이 51:49정도? 혹은 60:40정도??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깍듯하게 어르신들을 존대하는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인식되어갔다.
또 그곳에는 센터장의 외할아버지와 친할머니도 이용객으로 매일 출퇴근하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노골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불러가며 '차별 아닌 차별' 대우를 하고 있었다. 또한 어린이들 스쿨버스같은 노란색 승합차로 아침저녁 송영을 도맡아 하는 운전기사는 그녀의 아버지였다. 그녀는 가끔 센터에서 일을 도우려 남아있는 아버지에게도 '아버지'라고 칭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신의 가족이 함께 참여하는 사업이니 힘이 되고 의지가 되리라는 것은 이해하겠으나, 그렇게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사업가답지 않은, 프로답지 않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지난해, 사회복지 현장실습을 했던 (현재도 어머니가 이용하시는) 주간보호센터와 비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의 센터장은 그 본인 스스로가 절대로 어르신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을 뿐더러, 혹시나 직원들이나 실습생들도 반말을 하지 않도록 시시때때로 주의를 주고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곳의 사회복지사는 물론 요양보호사들 중에서도 센터장의 조카, 가족 등이 포진해 있었으나 누가 일부러 알려주기 전까지는 친족관계인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었다. 그만큼 그곳에서는 공적인 장소에서 철저하게 직함으로 상대를 칭할뿐더러 남다른 친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요양보호사들이 지켜야할 윤리의식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있다.
1.어르신들을 차별대우 하지 않는다.
2.어르신들에게 반말, 유아어 등 버릇없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존칭과 경어를 사용한다.
3.대상자의 사생활, 개인정보, 비밀을 내외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4.신체적, 정서적, 언어적 학대 및 폭력행위, 물질적 보상 요구를 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항은 요양보호사뿐 아니라, 노인들이 주대상인 복지시설의 종사자라면 지위를 불문하고 지켜져야 한다.
이중에서 특히 1,2 항목은 센터장 스스로가 먼저 위의 두가지 사항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가족같은, 친밀한> 이라는 구호는 위와 같은 윤리적 의무와 도리를 무시하는 데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