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오줌을 참은 채로 갇히다
첫 섹스는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또 성인이었을 때였다.
고등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 나는 장을 보러 다니던 대형마트에 곧장 취직했다. 고작 아르바이트였지만 경리와 근로계약서도 썼고 스텝이라는 직책 아래 이름이 쓰여 있는 명찰도 받았다. 첫 주말엔 서울에 있는 본사에서 직원 교육도 받았다. 각 지역 지점들에서 보낸 신입 직원들이 모인 회의실은 삭막했다. 밝게 웃으며 능숙하게 교육을 진행하는 본사 직원은 그런 삭막함이 개의치 보였다. 교육자가 아무리 웃어도 교육생들이 반응하지 않은 것은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교육생이 아무리 반응하지 않아도 교육자가 계속해서 웃는 건 낯선 광경이었다. 어쩌면 그의 눈엔 우리가 전혀 보이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그는 우리와는 무관한 자기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우리와는 무관한 그의 업무를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교육은 그게 전부였다. 탁. 내가 앞서서 집에 들어오며 식탁에 던진 교육 자료를 제이는 얼른 집었다. 그 대신 다른 손에 쥐어진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졸업도 전에 대기업에 취직해버렸네.” 제이는 교육 자료를 유심히 읽어보았다.
마트에선 매일 들어오는 맥주캔을 창고에 정리하고, 때마다 매장에 채워 넣었다. 그 일을 하면서 덕분에 캔의 주둥이가 얼마나 더러운지 알았다. 한 타임만 일하고 나면 캔에 묻은 먼지로 목장갑은 금세 새까매졌고, 또 새까매진 목장갑으로 캔을 만졌다.
내내 맥주캔만 만지고 퇴근해서는 들고 온 맥주캔을 무슨 과일을 닦듯이 흐르는 물에 얼마간 닦았다. 그리고 무슨 설거지를 마친 것처럼 캔을 식기 건조대 위에 얼마간 말려 놓았다. 그리고서야 냉장고에 넣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트 일을 그만두면서 그 짓도 그만두었다. 아무래도 그런 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통장에 찍힌 첫 월급은 나와 제이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익숙했던 집 앞 편의점이 마치 영화 속 마법사들의 상점처럼 무궁무진한 것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각자 장바구니를 하나 들고 편의점 매대 사이사이를 마구 쏘다녔다. 한바탕 돌고 나서 우리는 서로의 바구니에 어떤 것들을 들어있나 확인해봤다. 제이는 온갖 술을 색깔별로 담았고, 나는 콘돔 한 박스만 담았다. 내 바구니를 보고는 제이는 익살스럽게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의 첫 경험은 마트에서 같이 일하던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버스로 20분 정도는 가야 하는 옆 동네에 살던 그녀는 와인 시음 파트를 맡고 있었다. 내 어깨에 머리가 살짝 걸칠 정도의 키에 날개뼈까지 내려오는 진한 단발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항상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와인 코너 옆에서 광고판이 붙은 테이블을 세워 두고 조그마한 시음용 종이컵들에 와인을 따르며, 역시 그녀는 무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목장갑을 벗어 뒷주머니에 꽂아둔 채 그녀에게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녀가 내 스타일이었다거나 유달리 그녀가 예뻤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번호를 알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쉽게 번호를 알려줄 것 같았다거나, 그러니까 쉬운 여자로 보였다거나, 모종의 유대감을 느낀 것도 아니었다. 단지 번호를 알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 손엔 와인 병, 다른 한 손엔 종이컵을 쥔 채로 그녀는 잠시 나를 훑어봤다. 얼굴을 빤히 보고는 명찰이 있는 작업 조끼에서 낡은 컨버스까지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다시 와인을 종이컵에 따랐다. 그리고 그녀는 끝나고 저녁이나 먹자고 말했다.
일이 끝나고 우리는 마트에서 멀지 않은 먹자골목에 있는 고깃집에 갔다.
메뉴판을 가만히 보던 그녀는 내일 오픈 출근이라며 우리 집에서 자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직원을 부르더니 삼겹살과 소주를 주문했다.
그녀가 씻는 동안 나는 집을 정리하고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라 책상 서랍을 열어 콘돔을 하나 꺼내 두려고 했다. 한데 어째서인지 박스가 서랍에 껴서 쉽게 빠지지 않았다. 무리하지 말고 차분하게 꺼내자, 하고 조심스럽게 박스를 아예 서랍에서 빼내기 위해 살살 비틀며 빼냈다. 그리고 신중히 상자를 빼내고 있는 모습을 그녀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후 그녀는 가끔 맥주캔을 진열하는 내게 다가와 자고 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러라고 말했다. 그녀와는 물론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을뿐더러 전화번호마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관계가 무엇이고, 번호가 무엇인지 굳이 묻지 않았다. 몇 번의 식사와 몇 번의 섹스를 한 뒤, 굳이 그런 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렴 그런 숫자 따위는 역시 별 의미가 없다.
그녀는 팬티만 입은 채로 집을 돌아다닐 만큼 익숙하게 지냈지만, 집을 나오고 나면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는 그녀의 등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다. 자신이 했다기엔 어려운 위치에 있는 상처였다. 뭐 도전한다면 가능이야 했겠지만, 그녀 성격상 굳이 손도 잘 닿지 않는 몸에 상처를 내진 않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상처를 숨기지 않았다. 언제든 쉽게 등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는 그 흉터에 관해서 물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몸을 뒤섞는다고 내가 그녀에게 모든 걸 물을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건 아니었으니까. 나와 그녀는 딱히 서로에게 책임이나 권리를 가진 사이는 아니었다.
나는 그녀와 꾸준히 은밀한 짓도 하는 사이였지만, 딱 그뿐이었다.
“아니 번호도 모르는데 계속 만나?” 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응. 가끔.”
“그게 뭐야. 사귀는 것도 아니고, 그런 관계는 언젠간 무너지게 되어 있어.”
“사귀면 안 무너져?” 나는 감정 없이 되물었다.
제이는 그 말에 흥분해서는 관계를 규정하니, 사생활을 공유하니, 뭐가 필요조건이니 뭐니 떠들어댔는데, 어쨌든 나는 이해할 수 없었고 기억도 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사라졌다. 일을 그만둔 건지, 일하는 타임을 바꾼 건지, 아니면 완전히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행방에 관해 다른 이들에게 묻진 않았다. 왠지 몰라도 꼭 그녀가 그렇게 해주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찾지 말아 주길 바란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사실이 어떻든, 시간이 넉넉히 지나고, 자연스럽게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하루는 창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다 멀리 단발머리의 여자를 본 적 있다. 마트 뒤 큰 사거리 앞을 걷는 여자는 얼굴을 채 확인하기도 전에 코너를 꺾어 사라져 버렸다.
그때 나는 문득 그녀가 내 인생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을 확신했다. 그 장면은 일종의 마침표 같았다.
그래도 연락처라도 알아놓을 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내 그건 그녀도 바라지 않았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제이는 이에 대해 만족스럽게 평했다.
“그거 봐. 그런 관계는 그렇게 공허할 뿐이라고.”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