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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May 07. 2021

4화

쇼생크, 오줌을 참은 채로 갇히다


말은 도구이자 세계야. 네가 느끼는 거 상상하는 거 내뱉는 거 모두 언어를 통해서 그려진 거지. 진짜가 아니야. 넌 도구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도구가 세상인 줄 아는 놈인 거야. 모든 건 의미 없이 정한 것뿐인데. 교칙이고 선생이 뭐니 학생이 뭐니 예의니 뭐니. 뒤에서 그렇게 떠드는 이유? 짜증은 나는데 나설 만큼 용기를 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 아는데 안 하는 것뿐이다, 졸렬하게 그러고 있는 거 아냐. 옆에 똑같은 등신들 앉혀놓고. 안 그래? 그냥 어른들이 말했으니까 그런가 보다. 네가 이 병신 같은 시험문제에 대해, 저 선생에 대해 생각하는 태도가 그래. 그냥 그러기로 한 걸, 그런가 보다 하고 믿는 거. 네 삶은 죄다 그런 거야.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 아무 생각 없이 받드는 거지. 고작 성적 좀 잘 나오고, 애들이 멋있다고 빨아주니까 뭐 된 것 같아? 내가 병신 같겠지. 잘 봐, 결국 네가 너 병신 만드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거 쥐고 잘난 척하지 마. 병신 새끼야.
제이의 말에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시원시원한 성격에 중학교 때부터 반장을 도맡던 아이였는데. 제이에게 물려버리고 만 거다.

나는 벤치 옆 노란 가로등에 비친 제이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탄탄한 피부는 학창 시절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고, 곱슬한 머리와 작은 눈은 고집스럽고 시니컬한 성격 그대로였다. 어깨가 좁고 몸집이 호리호리해 그럴싸한 외모는 못되어도 키가 크니 여자들에게 나름대로 먹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뭐가 됐던 간 꼬리를 물고 끝까지 늘어지는 말버릇 때문인지 제이에게 여자들은 쉽게 다가가지도 않을뿐더러, 다가갔다가도 금방 지쳐버리곤 했다.

그때의 시험문제의 문제점은 지문이 짧았다는 거였다.―내가 이해한 바로는 말이다. 평소 수업에서 다루던 문제집에서 나온 문제를 그대로 낸 것이었고, 답도 순서만 1번에서 4번으로 바뀌었을 뿐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시험문제의 ‘문제’는 시험의 지문이 문제집의 그것보다 짧았다는 데 있다고 제이는 말했다. 제이는 그 시험문제의 답이 4번임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시험지에 나와 있는 지문만으로는 4번이 답이라는 근거나 힌트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지문이 짧아지면서 그 부분이 생략된 것이다. 물론 나는 시험지를 읽는 동안 전혀 몰랐는데, 공부 좀 하는 애들은 모두 의문을 품었고, 그런데도 모두 4번을 체크했다고 한다.
틀릴 게 뻔한 다른 선지를 고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정도를 갖고 선생한테 따져서 뭐해. 윤필재 그 아저씨 저번 중간고사 때는 이과 시험지에도 실수로 답 두 개 만들어놓고, 민수가 그거 물어봤다가 싸대기 맞았잖아. 문제가 두 개 고르라고 쓰여 있냐고. 수업시간에 이 문제 안 풀어봤냐고.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 솔직히 아무것도 아닌 건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 있냐.

하지만 제이는 달랐다. 이 자식은 OMR카드에 답을 체크하지 않았다.

제이는 시험지를 들고 며칠이고 선생에게 찾아갔다. 소리를 질렀네, 필재가 욕을 했네, 주먹질했네. 교무실에서 들려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제이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제멋대로 꼬불거리는 짧은 곱슬머리와 굳게 닫힌 입술은 제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아주 끈질기고 단단한 힘이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제이는 책상 서랍에서 너덜너덜해진 시험지를 들고 교무실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다음 교시 선생님이 들어오고, 잠시 후 제이는 교실에 들어왔다.

애초에 해결이 될 일이었다면 매일 매 쉬는 시간마다 저리 찾아갈 필요도 없었을 거야. 사서 고생이지. 사람을 봐가면서 따져야지. 무슨 개고생이냐. 같은 반 친구들은 낄낄거리며 자리에 없는 제이를 비아냥댔다. 그리고 성적 마감 하루 전 학교에는 경찰이 왔다.
영문도 모른 채 교장 선생님은 2학년 교무실로 헐레벌떡 뛰어 왔고, 제이는 차분하게 그들 앞에서, 그동안 질리도록 말했을, 시험문제의 오류를 설명하며 그동안 국어 선생님이 한 폭언 폭행을 기록한 종이를 경찰에게 건넸다고 한다. 교장 선생님은 경찰에게 건넨 종이봉투를 얼른 가로채며, 제이의 어깨를 안았다. 학교의 문제를 괄시한 자신의 책임이 크니 자신이 책임지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경찰들을 타일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할 때 종이봉투가 아니라 내 어깨를 흔들”었다고 제이는 말했다. 뭐 교장 선생님이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든 내가 원하는 것만 얻으면 되니까, 결국 그 방법을 택한 건 좋은 선택이었다고 제이는 설명했다.
문제는 무효 처리됐다. 선생님은 교무실 방송으로 제이에게 사과한다고 말했고 이후 아이들은 독하다며 제이에 대해 구시렁거렸다. 그동안 무시해왔기에 함부로 칭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역시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득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 의문을 품은 애들은 모두 4번을 찍었고, 그렇지 않은 애들은 그따위 일에 관심도 없었으니 말이다.
“나마저 나를 무시할 순 없어. 안 그래도 온 세상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뭉개버리려고 하니까.”

문제가 무효 처리된 바로 그 날, 제이는 우리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서 말했다.

사춘기의 제이는 그런 아이였다. 제이의 앞에선 게으름과 위선도, 우쭐거림과 교태도 부릴 수 없었다. 제이의 표현에 따르면, 그런 놈들은 하나같이 “한 번에 두 개를 하려는 족속”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이 또한 제이가 알려준 예시다― 여자 젖가슴 한 번 만져보길 바라면서, 겉으로는 다정한 신사인 척하는 남자들이나 자기가 멍청해서 설명하지 못하는 걸 믿음을 운운하며 의심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종교인. 어쨌든 선한 이미지도 챙기면서 이득도 챙기는 모든 사람이 ‘한 번에 두 개 하려는 족속’이라고 제이는 말했다. 그와 반대인 제이는 그런 상대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모든 걸 발가벗겨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었다.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싶다. 모르면 모른다. 상대방 입에서 그 말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족속.

“맨날 스타벅스만 가는 애가 얼버무리잖아.” 제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스타벅스에 그 오빠가 기다리니까 어디 딴 데 가고 싶다고는 못 하고,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야지 명분이 생기니까 커피는 마시겠다고 하고. 문제는 내가 안 꺼지고 있었던 거야. 눈치껏 빠져야 했는데 말이야. 내가 빠지고 그냥 커피가 마시고 싶었을 뿐인 자기는 우연히 오빠가 마시자고 해서 만나는 것뿐인 걸로 머리로 다 그려놨는데 내가 스타벅스를 가자니까 당황을 해 안 해. 오빠는 기다리지, 눈치 없는 남자친구한테 말은 못 하겠지. 진짜 꼴이 꼴사나웠는데. 그러다 결국 화를 낸 거야. 스타벅스에서 아는 오빠랑 약속이 있다고. 약속 못 지켜서 어떡하냐고. 씨발 왜 나한테 화를 내냐. 내 잘못이냐. 처음엔 나도 이렇게 생각했지. 그런데 잠자코 생각해보니까 그렇더라고. 내 잘못이 맞아. 애매하게 매력 없고, 나쁜 짓도 안 하는 거 그게 잘못인 거야. 헤어지자고는 못 하겠고, 재미는 없고 그게 진짜 잘못하는 거야. 상대한테 명분을 안 만들어 주잖아, 명분을. 너 별로야 이제. 저 오빠랑 한 번 만나고 싶어. 그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 뭘 해도 짜증이 나는 거지. 어느 날 장난을 치는 데 안 웃더라고. 그거 알지 영화에서 의수로 안마해주는 거? 그거 해주면 맨날 침 흘리고 웃던 애였는데, 한숨을 쉬더라고. 그때야 알았지. 끝났었구나. 조금 늦었지만 눈치껏 이년, 저년 하면서 욕하고 싸우고 끝났지.”

제이는 여기까지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스타벅스 사건은 열 번은 더 들었을 지루한 이야기였다.

너무 자주 들어 이젠 감흥도 없는 이야기였지만 오늘은 조금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분명 잔인하게 나쁜 여자 이야기였는데, 제이가 갑자기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 시인을 한 것이다. 거칠게 욕하고 헤어진 것도 사실 자기에게 질린 그녀를 위한 일이었다니. 갑자기 그녀가 그리워진 걸까. 사실 이별마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는 개소리를 내뱉다니. 의외의 결론에 나는 흥미가 생겼다.

“그 애도 나쁜 애는 아니었어. 집에 가는 버스를 탈 때, 내가 창밖에서 뻐끔거리는 걸 진짜 좋아했는데.” 제이는 다시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었다. 나의 흥미를 돋우려는 심산인지 제이는 갑자기 그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무슨 마음이 일어 저런 회개를 하는 걸까. 매력 없고 잘못 없는 게 오히려 죄라니. 갑자기 너무 외로워졌거나 아니면 그녀한테 무슨 연락이라도 온 거다. 나는 제이를 떠봤다.

“계속 연락 왔다며 헤어지고도.”

“시팔. 지 나쁜 사람 되기 싫어서지.” 감정 없이 제이는 말했다.

“아무리 쌍욕을 해도, 왜 그렇게 하는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거야. 욕을 먹어도 자기가 나쁜 사람 된 것 같은 기분. 그런데 그걸 시인할 수 없으니까 괜히 남한테 화를 내는 거야. 다들 그래.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남들한테 이기려고 들잖아. 그리고 용서도 남들에게 구하고. 자기가 나쁜 사람인 걸 시인할 용기도 없고, 그걸 인정하고 스스로 구원할 자신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남이 자길 용서해줬으면 하는 거지. 그 죄의식을 조금 덜어보려고 하는 개수작에 내가 넘어갈 리 없지. 널 정말 사랑했었다, 하는 순애보로 아름답게 마무리 지을 수 있게 해 줄 순 없지.”

역시 제이였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했지만, 제이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보잘것없이 홀딱 벗겨버렸다.

“됐고. 그걸 얘기하려는 건 아냐. 내가 고민하는 건, 아무래도 난 매력이 확실히 없는 녀석 같다는 거지. 또 이렇게 끝내버렸으니까. 이거 봐, 요즘 뱃살이 나오기 시작했어.” 제이는 자기 뱃살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저 뱃살 얘기를 하려고 그랬구나. 나는 김이 빠졌다.
 저녁을 먹고 나선 웬일로 산책을 하자며 나를 불러놓고 공원의 벤치에 앉아선 지난 연인까지 들먹이며 자기 뱃살을 한탄하는 녀석은 적어도 위선적이진 않았다. 뭐랄까, 조금 독특할 뿐이었다.

“너도 있냐?” 제이는 물었다.

“아니” 나는 우리 앞을 지나가는 여자를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제이도 그녀를 쳐다봤다. 분홍색의 뉴발란스 브라탑, 검은 레깅스. 포니테일 머리와 끈 스타일의 헤어밴드. 제이와 나는 항상 이런 여자를 찾고 있었다. 제이는 한참을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저런 거 차치하고, 나도 이제 가볍게 생각할 거야. 나는 너무 무거워.” 스포츠녀가 아주 멀어지자 그는 다시 말했다.

“그렇기도 하지.”

“맞아. 어떻게 하면 너처럼 될 수 있을까?” 그는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내가 왜?”

“너는 쉽게 섹스하잖아. 여자들한테 쉽게 말 걸고. 나도 그래야겠어.”

“쉽지 않아.”

“맞아 쉽지 않았을 거야. 근데 쉬워 보여.”

“그냥 말 걸어보고, 싫으면 그만인 거잖아.” 제이는 정면을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반대편에 있는 그녀를 찾는 듯 보였다.

“난 고민해본 적 없어.”

“그렇다면. 넌 어쩌면 엄청 많은 걸 놓치고 있는지 몰라.” 제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멀어졌던 그녀는 금방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계획한 운동이 끝났는지 트랙을 벗어나선 공원을 밖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제이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건 애초에 내가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러기엔 내가 너무 멍청해. 어차피 놓칠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 나는 말했다.

문득 전화가 울렸다.

정민이었다. 전화를 받았다.

우리는 인사를 건네는 대신 침묵했다. 잠깐의 침묵 이후 전화기 너머 정민이 조심스럽게 하지만 과감하게 물었다.

 “뭐해?”

“제이랑 잠깐 있어.”

“항상 제이랑 있는 것 같아.” 정민이는 조금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정민은 다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바쁘겠네.”

“그렇진 않아. 너 뭐하는데?” 나는 말하면서 잠깐 제이를 쳐다봤다. 제이는 입 모양으로 ‘여자?’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철이야. 퇴근하고 있어.”

제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괜히 엉덩이를 몇 번 털더니 발목부터 스트레칭을 했다.

“잠깐 볼래?” 나는 과감하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이는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돌리다 고개를 돌려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민이는 한숨을 쉬며 “응 역 앞에서 봐.”라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부럽단 말이야.” 제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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