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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Apr 23. 2021

2화

쇼생크, 오줌을 참은 채로 갇히다


이곳에서 일한 지 어느새 3년이 지났다. 공항 화물청사에 있는 물류회사인 이곳은 해외 화물들을 정리해서 그걸 주문한 국내 회사로 보내주는 일을 한다. 우리 회사는 열대 과일이나 유명 젤리를 컨테이너 단위로 받아서 작업하고 있다. 이 화물청사에는 우리와 비슷한 작업을 하는 회사들이 대부분인데 다루는 물건이 종목이 아주 다양하다. 니베아 로션, 콘돔, 도자기, 그리고 위험해 보이는 그림의 그려진 화학물질을 다루는 회사들도 있다. 그에 비하면 우리 회사는 아주 가볍고 달콤한 작업을 하고 있다.

“과일은 톤 단위로 들어와. 그러니 파인애플 1, 2, 하나하나 이름 붙여서 올 수가 없지. 파인애플 3톤에 파인애플은 5,000개 정도고 개중에는 오다 썩은 것도 있고, 무게에 짓눌려 뭉개지는 것도 있어. 그러니까 네가 챙긴 거는 오다 썩은 거야.” 큰 숫자를 다루며 작은 숫자는 신경 쓰지 않고, 하루 이틀 일이 지연돼도 크게 문제 삼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 그게 물류창고의 철학이었다.

3년 전 만난 팀장은 작은 키와 깊게 파인 주름을 가진 나이에 비해 늙어 보이는 사내였다. 작고 왜소한 몸의 그는 언제나 회사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있었다. 동그란 하얀색 로고가 왼쪽 가슴팍에 흐릿하게 박혀있는 주황색 기능성 티셔츠였다. 그 외에 창고에 들어갈 땐 익숙하게 회색 회사 재킷을 걸칠 뿐 다른 옷은 입지 않았다. 끽해야 1년에 서너 번 나타나는 사장도 있었고, 사무실에는 외투를 벗어두고 와이셔츠나 PK 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사원들도 있었지만, 매일같이 주황색 티셔츠를 걸친 채 화물청사 곳곳을 능숙하게 쏘다니는 팀장이 이 물류 회사의 실질적인 사장이고, 뚜렷한 상징과도 같았다.

작은 몸집과 달리 그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3톤 트럭의 큰 핸들을 넓게 쥐고 온몸으로 과감하게 돌릴 때면 가끔 핸들에 매달린 채로 엉덩이를 든 채 운전을 하곤 했는데 위태롭게 핸들에 매달린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안전벨트를 단단히 쥐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그는 조수석의 나를 돌아보는 여유까지 보이며 낄낄거리며 웃곤 했다.

“인생이라는 게 사실 별거 없다고. 군대도 가보면 그냥 사람 사는 데고, 빠구리도 사실 별거 없잖아? 응? 토끼 새끼처럼 굴면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라. 세상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쫄아서 질질 짜고 살면 그게 등신인 거라.”

창고에서 창고 같은 회사로, 누군가의 물건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받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달한다. 거룩하리만치 큰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물건이 쌓여 있지만, 정작 주인은 있지도 않고, 마주칠 일도 없는 헛헛한 쳇바퀴를 돈다.

어쨌든 쳇바퀴라도 능숙하게 도는 팀장은 한참 어린 조수에게 설교를 늘어놓곤 했다. 똑바로 서면 한참 내려다보게 되는 짤막한 그였지만 자신 있는 목소리와 의연한 표정, 그리고 거침없는 행동 때문인지 나는 그의 말이 꼭 모두 맞는 말이라고 느껴졌다(글쎄, 제이도 비슷하지만, 그 녀석 말은 딱히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든다).

“어릴 때는 여자를 많이 만나야지. 못 그런 놈들이 꼬옥 늙어서 바람피워…… 아예 한눈팔지 않는 사람은 그냥 없다고 보면 돼. 일찍 해봤거나, 늦게 해 보거나, 아직 못했을 뿐이거나. 아직 들키지 않았을 뿐인 거라.”

팀장에게는 초등학교 다니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와이프는 몇 년 전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갔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처럼 바람은 어쩌면 인생에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대 가고, 때가 되면 일을 구하고 결혼한다. 그리고 나면 애를 갖거나 바람을 피워야 하는 거다. 아니면 애를 갖고도 바람을 피워야 한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내가 하든지, 내 아내가 하든지. 아니면 그 아이처럼 부모님이 그렇든 말이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거지.

이곳의 일은 어렵지 않다. 물건이 왔다는 연락이 오면 적당한 크기의 트럭을 골라 창고로 가고, 창고 앞에서 물건들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물건이 나오면 물건을 싣는다. 그럼 끝이다. 연락을 받고 창고에 가선 10분에서 1시간, 얼마가 될지 모르는 시간을 막연히 기다린다. 그러다 물건이 나오면 트럭에 싣고 돌아온다. 기다림이 퍽 쓸데없이 수고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창고에서 물건이 나오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어떤 기준으로 부르는지는 몰라도 담당자에게 전화가 오면 팀장은 전화를 받고 나를 부른다. 그리고 나는 그를 따라 나간다.

밭은 높이의 터널을 지나고, 창고 앞에 도착해선 때가 되기를 기다린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건 분명히 내가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왠지 몰라도 그 역시 그랬다. 누군가를 보채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알 수 없는 기다림에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트럭의 시동을 켜 둔 채로 나는 팀장의 이야기를 듣는다. 문득 그의 여린 어깨너머로 물건이 나오는 걸 보면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물건을 실은 지게차를 가리킨다. 
그는 차에서 내려 지게차를 유도한다.

그동안 나는 목장갑을 끼고 트렁크 위로 올라가 빠레트를 차 버린다.

한참을 지게차가 건넨 빠레트에서 트렁크에 실을 빠레트 위로 물건을 옮긴다.
모두 옮기고 나면 근처 지게차가 말없이 와선 빠레트를 다시 트렁크에 실어준다.

물건을 싣고서 담배를 태우며 주의 깊게 바라본 아스팔트 바닥은 온통 담배꽁초로 가득했다. 여름이면 뜨거운 열기와 고약한 지린내가 진동하는 바닥이었다. 땀과 담배 지린내에 절은 여름이 지나가고, 목장갑을 끼고, 따뜻한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드리며 몸을 녹이는 겨울도 지났다.

팀장은 어제와 똑같이 오늘 일했고, 그깟 일 년쯤 코웃음 치듯 변함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에 올라타 운전을 했다.

하루는 내게 운전대를 맡긴 적이 있다. 바깥으로 쏠리는 무게중심에 고꾸라지는 건 아닐까, 커브를 돌며 시트에서 엉덩이를 떼고 온몸으로 운전하는 나를 보며 팀장은 낄낄 웃었다. 회사 앞에 다 와서는 그는 저 앞에 잠깐 세우라고 말했다.
“한 번이 어렵지.”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으면서 말했다. 나는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금세 땀으로 젖은 티를 털었다. 그의 말에는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일 따름이었다.

“챙겨가. 가족들이랑 먹어.” 추석을 앞두고 있었는지, 아니면 설이었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망고 한 박스를 내게 건네줬다.

그의 것도 아니고, 그가 산 것은 더욱이 아니었을 테지만, 그는 마치 그의 것 인양 인심을 쓰는 투로 말했다. 아무 생각 없이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문득 그래도 되나 싶었다. 이건 엄밀히 말하면 사장 것인데. 아니 엄밀히 따지면 사장은 물건을 옮겨주는 책임이 있는 것뿐이지 진짜 주인은 따로 있을 텐데. 겨우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는 직원이 제 것 인양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뭐랄까. 이건, 틀린 거야.

씨발 뭐라고 해야 하지. 걸리면 혼날걸요. 아니 그니까 이건 팀장님께 아닌데, 그렇다고 사장의 것도 아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니까, 사장은 여기 있지도 않고, 그러면 열심히 일한 팀장의 몫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순간 생각에 빠졌지만, 깊숙이 들어가진 못한 채로 수면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잠수 도구의 부재를 깨달았다. 머릿속에 이름을 들먹일만한 학자의 말 따위를 준비해놓는 제이가 아닌 나로선 이런 생각은 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냥 팀장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해버렸다.

‘이런 거 하나쯤이야 썩은 거라고 치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익숙하게 창고 구석에 있는 의자에 외투로 가려놓았다.
그날 저녁 외투를 입고, 망고를 오른 겨드랑이에 낀 채로 퇴근하던 차에 사장의 검은색 세단과 마주쳤다. 찰나에 박스를 숨겨야 할까 고민하다, 그 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유리창에 대고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민이라는 건 내가 능히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어차피 저 녀석 것도 아니잖아’하고 털어내 버렸다. 나는 순환버스가 오는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 마음이 불안했지만. 한 박스 정도야 시급에서 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사장에게는 망고나 우리나 둘 중에 무엇을 까버려도 상관없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다. 다음 날 팀장은 출근하지 않았다.

오지 않는 그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닿지 않았다.
“시팔 처먹는 놈 따로 있고, 일하는 놈 따로 있지.” 3층 사무실에 있던 사원은 구시렁거리며 회사 창고로 내려왔고, 나는 얼떨떨하게 그에게 팀장의 맡던 서류와 트럭 키를 받았다.
서류는 죄다 영어로 쓰여있었고, 사원은 주의해서 확인해야 할 몇 가지 글자들―회사 이름, 과일 이름, 그리고 몇 톤인지 정도의 단어였기에 어렵지 않았다―을 주의받았다. 걱정할 새도 없이 혼자 트럭을 운전해서 창고로 갔고, 서툴지만 서류를 확인하고 물건을 가져왔다. 하필 기다릴 새도 없이 나온 물건을 담배 한 번 피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옮겼지만,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오래 걸렸다.

트럭이 얼마나 덜컹거리는지도 모른 채 오직 저 멀리 다가오는 짧은 터널만을 바라봤다.

그 익숙한 터널이 마치 혼자 남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팀장의 말을 중얼거렸다.

터널을 지나면, 바로 2차선을 옮겨 바로 나오는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했다. 그날 내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후로 팀장을 볼 일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그 일곱 글자가 여전히 나만의 주문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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