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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호 Jun 19. 2021

에필로그

쇼생크, 오줌을 참은 채로 갇히다

몇 해 전 무릎을 다쳤습니다. 코트를 지르밟고, 가볍게 뛰어오른 발은 어째서인지 골대 기구 밑으로 떨어졌고, 코트와 기구 사이에 처박히며 무릎이 가차 없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청원휴가를 잔뜩 쓰고 때아닌 여름방학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타구니까지 올라오는 통깁스를 한 채 꼼짝도 못 하는 신세였지만 여러모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한동안 보지 않던 드라마도 느긋하게 정주행 했고,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고질적인 팔꿈치 통증과 허리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막상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멈춰 서보니 문득 그동안 제가 꼭 무엇에 홀린 것처럼 고집스럽게 살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다신 드라마를 챙겨볼 시간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반드시 매일 운동을 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말이죠. 익숙하고 편안했다고 자부하는 삶이 되레 어리석은 고집으로 가득했었던 것 같달까요.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닌 것을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만, 반대로 꼭 그래야만 해도 상관없다는 상관은 없다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습관에 젖어 나태한 고집으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죠.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신념보다 굳이 그러지 않을 필요도 없다는 나태함이 우리를 더욱 고집스럽게 만들곤 하니까요.


제게는 오래된 친구가 하나 있는데 고등학교를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한 이후 방학 때나 가끔 보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저는 대학을 진학했고, 녀석은 서울에 있는 학교인지 학원인지 불명확한, 그러니까 그곳을 입학했다거나 진학했다거나 아니면 수강한다거나 뭐라 말하기 힘든, 곳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저는 학군단에 입단해 졸업과 동시에 임관했습니다.


이렇게 방학이 된 김에 저는 녀석에게 연락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녀석은 제 안부를 걱정하기는커녕 활짝 웃으며 반겼습니다. 녀석의 병문안은 뭐랄까. 심심한데 잘됐다는 태도에 가까웠습니다.


녀석은 축구를 좋아하고, 술 담배를 특히 좋아합니다. 여자로 말할 것 같으면 이왕이면 어리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사람을 좋아하죠. 농구를 좋아하고, 술 담배보단 산책을 좋아하는 저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죠. 가끔 “말문이 안 통하네!”하고 관용구를 기이하게 섞어 말하는 그의 서툶을 저는 아주 싫어합니다. 여색을 밝히는 것이나 술 담배를 절제하지 못하는 거나 심지어 농구가 아닌 축구를 좋아하는 것까지. 저는 녀석의 행동거지가 웬만해선 마음에 들지 않지요.


녀석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관해서 어리석을 만치 무심하면서 또 과감했고, 그런 녀석에게 제가 아무리 짜증을 내도 녀석은 괘념치 않고 자기 이야기를 해댔습니다.


오는 길에 햄버거를 사 오라는 말에 녀석은 무슨 햄버거를 사 오냐 묻지도 않고, 치킨 버거 중 가장 값싼 것으로 사 왔습니다. 어째서 묻지도 않고 사 왔느냐 쏘아붙였지만 역시 녀석은 무심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무시했습니다. 제 옆에 앉아서 TV를 보며 낄낄거리는 녀석을 보며 내가 녀석을 나태하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나태한 고집이나 습관처럼 말이죠.


근래 소설은 현실을 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저는 이 글을 퇴고하면서 매번 현실을 왜곡하기 위해 부단히 힘썼습니다. 내가 아는 것을 내가 아는 대로 이해하지 않기 위해서. 되도록 오해하기 위해서 저는 부지런히 퇴고를 거듭했습니다. 당연한 것을 자꾸 오해하는 것이 진실에 다가가는 노력이란 터무니없는 믿음이 제겐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몰라도 무해(無害)할 거란 기이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모두에게 이 글이 심심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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