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생크, 오줌을 참은 채로 갇히다
저녁 여덟 시. 이쯤이면 붉게 기울던 하늘은 이미 어둡고, 푸르러졌다. 공기도 차가워졌다.
화물청사를 도는 순환 버스 안 조명은 영 칙칙하다. 창 너머로 푸른 어두움 아래 짙은 가로등을 바라보다, 문득 창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더는 어리다 이를 수 없는 낯선 사내가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겹지도 않고, 어딘지 주인공 같지도 않은 무심한 얼굴의 사내를 나는 마주 봤다. 날이 차길래 걸친 것뿐이었는데 회사 로고가 박힌 회색 재킷은 인물을 더욱 밋밋하게 만들었다. 사내의 턱수염에 나는 슬며시 손을 대었다. 매일 아침 아버지가 세면대에 담긴 물에 면도기를 털어내는 모습을 보며 면도는 참 멋진 작업이라 생각했었다. 주말 늦은 오후, 안방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제멋대로 자라난 수염도 나는 멋있는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나저러나 나는 얼른 수염이 있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처음 면도하고 바로 그다음 날, 나는 제이에게 이게 면도한 입 주위를 보여주며 자랑했다. 제이는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체육 시간에 첫사랑 겨드랑이 털을 봐버렸다고 말했다. 이제는 그 아이를 좋아할 수 없게 됐다고, 제이는 한탄했다. 상심한 제이의 인중에는 솜털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진한 털이 자라나 있었다. 사내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떠나버린 제이의 어린 얼굴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무너져버렸어.” 제이는 떠나기 전 그렇게 고백했다.
“내일 아침에 지각하면 어떡하지? 아니면 오늘 정리해 놓은 자료가 다음날 감쪽같이 사라졌으면 어떡하지? 그딴 생각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와. 막상 출근하면 사람들하고 농담 따먹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 그런데 또 집에 돌아오면 이상하게 답답해.” 그는 일회용 그릇 위에 단단히 불어버린 막국수를 젓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나는 TV에서 하는 미국 영화를 보고 있었다.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TV에서 수없이 틀어주는 영화.
“커피 안 마셔.”
“에너지 드링크.”
“안 마셔.”
“녹차도 카페인 많은데.”
“씨발놈이,”
“다들 그렇게 살아. 그냥 그러기로 한 걸, 그런가 보다 하고 사는 거지.” 주인공이 쏜 총알에선 미사일 소리가 났고, 카우보이의 가슴팍에선 피가 솟구쳐 나왔다.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꼴이 퍽 우스웠다. 나를 바라보던 제이는 TV에서 나오는 카우보이의 비명에 주목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그 고리타분하고 잔인한 총격신을 바라봤다.
“너 중학교 때 기억나냐? 시험문제 이상했던 거.”
“응 기억나.”
악당은 모조리 죽었고, 결국 지친 주인공만이 살아남았다. 그런 영화였다. 영화 시작부터 등장하던 주인공의 친구만은 결국 죽여버리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오락영화. 나는 주인공이 악당의 머리를 터뜨려버리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가 죽기 전에 돌려 버려야지.
“그때 김민석 그 새끼가 비아냥댔잖아, 애새끼들이랑. 3점이 아까워서 저 지랄이라고.”
“기억나. 네가 상욕(常辱) 한 것도.” 나는 슬슬 리모컨을 찾았다. 곧 있으면 친구가 죽는다.
“그 뭐랄까. 그때 느낀 건데, 난 일본에서 한국어를 쓰고 있어.”
“그러게 왜 일본을 갔어.” 리모컨은 보이지 않았다. 주인공은 모두 쓰러뜨리고 한숨 돌리고 있었다. 이제 곧 시체들 사이로 숨이 살아있는 적이 주인공을 향해 총을 겨눌 것이다. 리모컨이‥‥‥ 리모컨이……
“문제라면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문제겠지. 애초에 여기가 일본인 거야. 분명 같은 곳에 사는데 나만 다른 말을 하고 있어. 대화가 안 통하잖아. 그래서 쓰는 말이 다르다는 것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말이 다르면 보는 것도 달랐던 거야. 내가 쓸데없이 사변적이었던 것도 그런 말을 배워서 그래. 아니 이 명제는 이미 중립적이지 못하다. 사변적이라는 특징을 인정해야지 쓸데없다는 건 중요하지 않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리모컨을 찾아야 했고, 또 ‘사변적’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피가 흐르는 시체들 사이에서 또렷하게 살아있는 눈동자가 보인다. 슬며시 권총을 쥔 손은 주인공을 향해 뻗는다. 제이는 아무런 의식도 못 한 채 말을 잇는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어릴 땐 한국어를 쓰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싸웠는데. 언제부턴가 일본어를 쓰지 않는 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수룩한 생떼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거야. 그러다가 고장이 났는데 말은 못 하고, 내가 고장 난 걸 보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봐 달라고 찡찡대는 병신이 된 거야.”
제이는 얼마 전 일을 관뒀다. 몇 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배달음식만 시켜 먹으며 TV만 봤다. 졸리면 자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모은 돈을 까먹으면서 빈둥대면서 그런 생활에 대해서 “일종의 재정립 기간이야.”라 짧게 설명했다. 어쨌든 신경 쓰지 않았다. 제이는 태생이 반골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엔 그런 행동들이 모두 뻔하고 고리타분했다. 중요한 건 사라진 리모컨이었다. 주인공 친구는 순간 반짝이는 빛에 눈을 찡그린다. 그리고는 그 빛이 저 멀리서 주인공을 겨누는 권총에 비친 햇빛임을 깨닫는다.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친구,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
“나 떠날 거야.” 제이의 고백과 함께 친구는 주인공을 대신해서 총을 맞았다.
오늘 새벽 제이는 해외로 떠났다. 공항 근처에 살지만 실제로 우리는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이 없었다. 6시간이나 일찍 나온 제이는 서툴게 짐을 부치고, 공항 지하 1층에 있는 중국집에서 밥을 먹었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어쩌면 비행기가 아닌 공항버스를 타고 지방으로 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이용객의 지인으로 서성이는 공항은 사뭇 달랐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 나와 제이는 괜히 공항을 어슬렁거렸다.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24시간 열려있는 타코 가게에 앞에 서서 맥주를 한 잔 마실까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바로 옆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언제 돌아오냐.” 나는 편안한 얼굴의 제이에게 물었다.
“가끔 맥주 생각나면 올게.” 이곳에 마음을 완전히 정리해버린 사람의, 아니 처음부터 이곳 사람이 아닌 낯선 이의 얼굴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제이는 어디론가 돌아갔다.
버스 창문 넘어 진한 저녁 하늘이 보였다. 집에 도착하면, 샤워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킷은 책상 의자에 걸쳐놓았다. 화장실 앞에서 양말과 팬티를 벗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샤워를 짧게 끝내고, 수건을 하나 꺼내 뜨거운 물에 적신 뒤 물을 꼭 짰다. 그리고 입에 잠시 가져다 댔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수건을 내려놓고 쉐이빙 젤을 입 주변에 발랐다. 그리고 면도기를 뜨거운 물에 적신 뒤 면도를 했다. 왼쪽 뺨을 면도한 뒤 익숙하게 날을 물에 털었다. 그리고 오른쪽 뺨에 가져다 댔다. 화장실에서 나와 스트레이트 핏 워싱진에 몸에 맞는 검은색 폴로 카라티를 입었다. 왼손에는 은색 카시오 전자시계를 찼다. 머리를 넘기고 드라이를 했다. 포마드로 머리를 정리했다. 옷장을 열어 회색의 체크무늬 블레이저를 골랐다. 그리고 몸에 향수를 뿌릴까 고민했지만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집을 나왔다.
정민이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정리 좀 했어.” 나는 대답했다.
홍대입구역은 밤이 되면 더욱 밝아지고, 거리에 힘이 생긴다. 나와 그녀는 그 컴컴한 밝은 길을 걸었다. 고기 굽는 소리, 옥상 라운지 바에서 내려오는 음악, 그리고 여기저기 밝은 조명들과 북적이는 사람들로 거리는 가득했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정민에게 물었다.
“좋았어. 부장이 소리 지른 것만 빼면.”
“부장님 목소리는 어땠는데?”
“목소리는 나름 괜찮았어.”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하더니 부장의 목소리에 후한 평가를 했다.
“그 정도면 좋은 하루였네.”
“그런 것 같아. 너는?” 그녀는 내게 되물었다.
“나도 좋았어. 아침에 커피에 우유를 넣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커피를 다 마셨어. 그리고 커피를 한 잔 더 마실까 고민했어.”
“마셨어?”
“안 마셨어.” 나는 말했다.
“점심엔 불고기가 나왔는데, 언양식이라 젓가락으로 집기 불편해서 그냥 밥에 비벼 먹었어. 된장국에 두부도 몇 숟갈 넣고.”
“맛있었겠다.” 정민은 입맛을 다셨다.
“불고기?”
“응. 된장국도.”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꼭 소녀 같은 표정이었다.
“고추장도 조금 넣고, 참기름도 넣으면 맛있지?”
“아, 맛있겠다.”
“먹고 싶어?”
“응. 그런 게 땡기네.”
“내가 해줄게. 집에 가자.” 나는 말했다.
“너희 집에?” 정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봤다.
“응. 해줄게. 찌개는 있으니까. 가면 금방 차려줄 수 있어.”
그녀의 눈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갈색빛이 흐르는 또렷한 눈빛이었다. 눈동자 안에는 야경이 듬뿍 비치고, 그 중앙에 내가 우뚝 서 있었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좋아.”하고 대답했다.
어느 가게에서인지 그린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가 흘러나왔다. 노랫소리가 아득해지며 그녀와 나는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빠져나와 지하철을 탔다.
역에서 내려 우린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마트를 향해 걸으며 그녀에게 ‘쇼생크 탈출’이라는 영화를 알고 있냐 물었다. 정민이는 들어본 적 있다고 했다.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다시 볼까 싶은데,
“같이 볼래?”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 지으며,
“근데 나 쉬 마려워”하고 얼른 속삭였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은 유난히 맑고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에서 나와 그녀는 웃으며 지하철역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fin.
* 다음 주엔 에필로그(작가의 말)가 업로드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