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시간 속에 따뜻한 온기 하나
자고 일어났더니 밤새 눈이 온 모양이다. 창문 밖은 어느새 온통 새하얀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밤사이 누군가 세상을 하얀 이불로 포근하게 덮어 놓고 간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해지기 시작한 작년 10월 즈음부터 첫째는 겨울이 언제 오냐고 자주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겨울이 올 거라고 대답했다. 아이는 겨울의 첫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의 공기는 누가 봐도 겨울임을 알아차릴 만큼 날이 갈수록 매서워졌지만, 아이가 기다리던 첫눈은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친정 부모님이 계신 남쪽은 인천보다 따뜻한 곳이지만 해마다 눈 소식은 오히려 더 잦았다. 그것도 진눈깨비가 아니라 대부분 수북이 쌓이는 함박눈이었다. 왜 여긴 더 추운 곳인데 눈 구경하기가 더 어려울까. 예년 이맘때쯤이면 늘 같은 의문이 들곤 했다.
나야 눈이 오거나 말거나 이제는 크게 상관없는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의 겨울은 달랐다.
눈이 내리던 겨울날의 즐거운 기억이 아이에게 하나쯤은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커서도 문득 떠올릴 수 있는 그런 기억 말이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인천에도 첫눈이 내렸다.
그러나 눈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민망할 만큼 잠깐 내렸다가 금세 녹아버렸다. 아이는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쉬운 얼굴로 돌아섰다. 창밖에는 차가운 겨울바람만 지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괜히 마음이 쓰였다.
날이 갈수록 이젠 나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다리는 아이에게 수북이 쌓인 눈을 어쩌면 이번 겨울에는 보여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눈썰매장이라도 데려가야 하나 싶어 근처 눈썰매장을 미리 검색해 두기도 했다.
그리고 2026년 1월 24일 토요일.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습관처럼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침 일찍 출근한 남편에게서 메시지가 와있었다. 집 앞 풍경을 찍은 사진 한 장이었다. 사진 속 길은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나는 내심 아이처럼 기뻤다. 커튼을 살짝 젖혀 창밖을 확인했다. 눈은 새벽사이 부지런히도 내렸는지 제법 소복이 쌓여 있었다. 놀이터도, 길도, 나무도 모두 하얀 눈 아래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상이 하얗게 숨을 죽이고 있는 아침이었다.
이 정도면 눈사람도 만들고 썰매도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뻐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비몽사몽이던 정신이 단번에 깨어났다.
밤새 눈이 온 줄도 모르고 아이들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서둘러 아침을 준비했다. 간단히 먹고 아이들과 함께 밖에 나갈 계획이었다. 냉장고에서 버터를 꺼내 팬을 달군 뒤 식빵을 노릇하게 굽고, 계란을 풀어 스크램블도 만들었다. 고소한 버터향이 주방에 퍼지자 괜히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평소 차가운 공기에 늘 어깨를 움츠리며 준비했지만, 오늘 아침의 부엌은 이상하게도 조금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잘 구워진 식빵에 딸기잼을 발라 접시에 담고 우유도 컵에 담았다.
이제 아이들을 깨우기만 하면 된다.
나는 두 아이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눈이 많이 와서 온통 하얀 세상이 되었다고 평소보다 한층 밝은 목소리로 아이들을 깨웠다.
꼬물꼬물 애벌레처럼 꿈틀대며 일어난 아이들은 좀 전의 나처럼 커튼을 젖혀 눈이 온걸 직접 확인하고 말했다.
'우와 진짜네?'
'엄마 함박눈이에요?'
첫째가 믿기지 않는 듯 되물었다.
'그래 함박눈이라서 많이 쌓인 거야. 얼른 먹고 밖에 나가자!'
평소라면 아침은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한참이 걸렸을 텐데, 이번엔 접시 위 음식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서둘러 아이들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무장을 시켰다. 핫팩도 따로 챙겼다. 베란다 한쪽에서 오랫동안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썰매까지 꺼낼 생각에 나까지 괜히 들떴다.
집을 나서자마자 아이들이 먼저 밖으로 뛰어나갔다. 놀이터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이었다.
밤새 내린 눈이 놀이터를 포근하게 덮어놓고 있었다.
첫 발자국을 남긴 것도 우리였다.
그 순간만큼은 놀이터가 온전히 우리만의 세상처럼 느껴졌다.
아이들은 눈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발이 닿을 때마다 눈이 푹푹 꺼졌다.
나는 가장 먼저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수분기가 없는 가벼운 눈이라 그런지 아무리 두 손으로 꾹꾹 눌러 모아도 눈덩이로 잘 뭉쳐지지 않았다. 작은 덩어리를 만들어 눈밭에 굴리며 몸집을 키워볼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둥글게 말아봐도 부서질 뿐이었다.
눈사람을 만들지 못해 아쉬웠지만 우리에겐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빨간 썰매였다.
몇 해 전 썰매를 살 때 유행하던 감성적인 베이지색을 사고 싶었다. 하지만 급한 대로 당일배송 되는 것을 고르다 보니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 새 빨간색의 썰매를 사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몇 번 타지 못했다. 오랫동안 쓸모를 증명하지 못한 채 베란다에서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달랐다. 마치 그 썰매도 눈 오는 날을 오래 기다려 온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이들을 태우고 썰매를 끌었다. 숨이 차올랐지만 속도를 내어 달릴 때마다 뒤에서 까르르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반복해서 썰매를 끌다 보니 내가 흡사 루돌프가 된 것 같았다. 산타는 없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만으로도 충분히 신나는 아침이었다.
어릴 적 눈밭에서 놀던 즐거운 기억을 내가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처럼, 내 아이들에게도 분명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함께 눈싸움도 하고, 언덕에서 썰매도 타고, 눈틀로 오리 모양도 만들었다.
그러다 눈이 잔뜩 쌓인 나무들을 발견하고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아이들을 나무 아래로 불러 세우고 나뭇가지를 힘껏 흔들었다. 순간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한꺼번에 아이들 머리 위로 폭포처럼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얀 눈이 아이들 모자와 어깨 위로 소복이 내려앉았다.
“엄마!”
놀란 소리가 터졌지만 곧 웃음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깔깔깔 웃으며 마음껏 눈을 맞았다.
한 시간 넘게 쉬지 않고 신나게 놀았다.
첫째가 힘들었는지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다.
조금 지쳐 있던 나는 속으로 잘됐다 싶었다. 생각보다 더 빨리 끝나 다행이었다.
현관문에서 옷에 쌓인 눈을 탈탈 털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난 핫쵸코를 만들었다.
눈놀이 후에 핫초코는 꽁꽁 얼어있는 몸을 천천히 녹여주었다. 컵에서 올라오는 김이 얼굴에 닿자 코 끝이 찡해졌다. 아이들은 호호 불어가며 핫초코를 마셨다. 오늘은 유난히 더 맛있게 먹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켠이 따뜻해졌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린 시절의 즐거운 기억 속에 오늘의 눈놀이와 핫초코가 한 장면쯤 남아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추억을 또렷하게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살면서 문득 마음이 추운 날,
달달한 핫초코가 차가운 몸을 녹여 주었던 것처럼
오늘의 이 기억이 부디 너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줄 수 있기를.
따뜻한 온기로 오래 남아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