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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글음 Apr 20. 2023

이런 고구마 사랑 같으니라고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여기, 고구마 같은 사랑 이야기를 소개한다. 1909년에 출간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제롬이라는 남자가 있다. 사촌 누나인 알리사라를 사랑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이 여자만을 사랑했다. 둘은 오랜 시간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알리사는 제롬을 직접 만나기를 꺼려하며 거리를 둔다. 어쩌다 만날 때면 둘 사이에는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감돈다.


마치 카카오톡이나 줌미팅으로는 세상 다정하게 대화해 놓고 막상 만나고 보면 말문이 막혀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상황과 비슷하다. 20세기 초 프랑스식 온오프라인의 차이인가? 글로 나눈 사랑과 현실의 만남 사이에 간극이 커서 오해했다. 알리사는 제롬이 별론가보다 라고. 하지만 마지막 부분 알리사의 일기를 보면 그녀 또한 얼마나 제롬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어후,  답답하다. "제롬이 네 남자라고 왜 말을 못 해! 손 붙잡고 입 맞추며 연애라도 해!"라고 외치고 싶다. 알리사가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 종교적인 신념 때문이다. 인간의 사랑을 넘어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을 택한 그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했기에 그들의 사랑은 해피앤딩이 되지 못한다.  


어라, 이런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 극 중에는 동훈(이선균)의 친구이자 대학생 때 돌연 출가하여 스님이 되어버린 "겸덕(박해준)"이 나온다. 당시 그를 좋아했던 정희(오나라)는 십수 년이 지난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그때도 나는 외쳤다. "다시 정희에게 돌아가! 둘이 행복하게 살면 안 되겠니?" 겸덕은 돌아가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신념을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종교적 목적이 아니더라도 큰 뜻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시킨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대의명분이 개인의 행복을 앞지를 수 있을까. 개인의 시대가 도래한 오늘날 나로서는 이해가 쉽지는 않다.  


고등학생 때 어떤 남자 애가 "너는 <좁은 문>에 나오는 알리사 같아"라는 내게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책을 읽지 않았기에 그 말은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았다. 이제야 풀렸다. 계속되는 그의 고백에도 늘 뜨뜻미지근하게 (그러나 늘 조그마한 가능성은 남겨둔 채) 반응했던 나의 태도가 알리사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알리사는 무슨. 똑 부러지게 거절 못해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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