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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녜 Feb 21. 2021

한 달간의 독립기

독립하겠습니다_11

올해의 13%가 지나가버렸다. 그 말인 나의 독립도 스타트 총성이 울린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는 것. 사실 한 달이 뭐야, 이제 이월 말이니까 한 달 하고도 보름은 되었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 생일 주간과 집들이 주간과 신년회 주간을 보내며 몇 밤 자고 났더니 금세 이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면서도 짧지 않은 시간이기도 했다. 살을 4킬로나 찌우고, (흑흑) 생활리듬 패턴을 정착시키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더 단서를 찾아가고 있는 시간이다. 


그런 와중에 아직 집이 완성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 뭔갈 더 채우고 싶고, 부족한 것들도 보인다. 

예를 들면 아직도 메인 요리를 담을만한 널찍한 플레이트를 장만하지 못했다. 새하얀 빌트인 테이블을 아껴 써보고자 테이블 매트를 사겠다 다짐한 지 어언 몇 주짼데 아직도 고르지를 못했다. 식물도 좀 들여놔서 초록 초록한 집도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 많은 욕심을 빨리 채우지 못하고 있는 건 돈도 써본 놈이 쓰기 때문이겠지. 


본가의 그릇이나 생활 용품은 죄다 엄마가 이렇게 저렇게 모아 온 것들이다 보니, 그리고 본가의 가구들도 어렸을 때 부모님이 골라주신 것이다 보니, 나의 생활용품에 대한 취향은 사실 아예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물론 남의 집을 구경하면서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하는 것들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공간의 다른 요소들과 합쳐 어떤 고민으로 물건들을 장만했는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서, 이 컵을 사면 붕 떠 보이지는 않을까, 이미 마련한 이 접시랑 저 접시를 같이 쓰면 이상하지 않을까 고민이 됐다. 그렇다고 무난 템으로 채우자니 재미가 없고, 위트를 더해보자니 부담스럽고. 이 세상 어딘가에 나의 취향과 위트와 다른 것들과의 조화까지 찰떡같이 만족시켜줄 수 있는 그릇계의 유니콘 같은 것이 있을 거라는 환상 속에 빠져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있었다.

온전한 내 취향으로 집을 꾸미겠다고 선언해놓고는, 접시 하나 컵 하나를 고르지 못해 장바구니만 몇백만 원 채우고 있는 사람 바로 나야 나. 


취향이 뭔지 모르겠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이 집을 유지 보수하는 모든 오너십이 내게 있는 게 문제다. 이제는 내가 치우지 않으면 정말 아무도 치우지 않으니까. 내가 어디다가 뭘 두면 그것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게 있으니까. 엄마에게 엄마 그거 어딨어!라고 소리쳐 물을 수도, 아빠 벌레 잡아줘!라고 비명을 지를 수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말끔해진 화장실을 만날 일도 없고 배수구에 흘려보낸 음식물 찌꺼기는 결국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치우는 수밖에. 


그래서 뭘 하나 들일 때 이게 관리가 얼마나 어려울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나도 예쁜 트레이 좀 사다 놓고 액세서리랄지, 화장품이랄지 예쁘게 늘어놓는 걸 해보고 싶다가도, 그 위에 쌓일 먼지를 생각하면 다 통 안에 넣어버리는 게 최고인 거 아닐까 싶다. 커다란 포스터를 살까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이거 질리면 어디다 치워둘 거냐 싶다. 화분을 살까 고민하다가도, 벌레가 나올 수도 있다던데? 언젠가 분갈이를 해야 한다던데? 잘못해서 넘어뜨리면? 같은 생각이 시작되면 도무지 용기가 사라진다. 초록 초록한 예쁨보다 깨끗한 내 집이 더 소중하니까. 집을 알차게 채우고 싶으면서도 쓸데없는 짐은 절대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은 아마 이제 지저분함을 만들어 내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가 아니라서 그렇겠지.


본가에 간 어느 주말에 한참을 집에 먼지가 그렇게 많다고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다고 하루에 청소기를 몇 번씩 돌린다고 투정을 부리니 엄마 아빠는 집에서나 미리 좀 해보지 그랬냐며 핀잔으로 내 입을 막았다. 

무슨 마음인지도 알면서도, 본가는 정말 내 공간이라는 오너십이 없어서일까, 도저히 그게 안되던데? 흑흑.


내가 바라는 건 약간 복잡하고 약간 미묘하다. 

나는 정갈한 집이 좋다. 하지만 유지보수에 손은 많이 가지 않지만 휑하지도 않은 집. 그러면서도 지루하거나 뻔한 집은 아닌 집. 그런 집을 만들고 싶다. 여기에 꼭 더하고 싶은 킥이 있다면, 누군가를 초대했을 때 와 이 집 되게 너 같다!라고 말해주는 그런 집. 그런 집을 잘, 만들어 보고 싶다. (과연 남은 전세기간 22.5개월 동안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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