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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백설장 01화

백설장 1

-아주 오래된 거울

by 이도원

나는 백설장이라는 여관에 걸려 있다. 내가 태어난 연월일, 생산연도는 알 수 없다. 신여사가 시집올 때 물려받은 것으로 족히 백 년쯤은 될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cctv처럼 매일 질펀하면서도 몽롱한 남녀의 성행위를 반복하여 보는 것이 나의 책무이다. 이런 여관에서 거울이란 위대한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응시나 성찰의 거울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런 여관에서 절제되고 순정적인 사랑이라는 것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귀하고 드문 경우여서 이들의 성행위는 곧잘 치정으로 이어진다. 성애 끝에 일어나는 충격적이고 과격한 사건과 지루한 성관계는 대개 일정한 패턴이 있어 나는 때론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 멍하다.


백설장의 vip룸인 이 별채는 신혼부부에게 인기였다. 몇 만 원의 돈을 더 지불하고 들어온 사람들은 고풍스러운 방에 걸맞은 나를 보며 멋진 거울이야. 우리도 이렇게 백년해로할 수 있겠지, 하며 탄복했다.

그날은 보름날이었다. 신혼부부는 둘 다 농부였든지 삼십 분이 넘게 침대 위에서 날씨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이른 새벽 말끔하게 방을 청소하고 나갔다. 유원지의 오리배를 탈 시간도 인근 식당의 문을 여는 시간도 멀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호수를 몇 바퀴나 돌 때야 너무 일찍 여관을 나온 것을 알게 되며 도시의 아침과 자신들이 있던 곳의 아침이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건과 비누, 청소도구를 실은 수레의 바퀴소리와 함께 복도를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가 들려온다. 나춘희 씨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온다. 꽃무늬가 요란한 블라우스를 입은 나춘희 씨의 풍만한 몸매가 드러난다.

나춘희 씨는 건성건성 방의 먼지를 털어내었다. 노인 손님들이 대실을 하고 난 뒤라는 것을 한눈에 파악한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춘희 씨가 노인 손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 든 사람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방향제만 좀 뿌리면 될 뿐 젊은 남녀의 욕정의 흔적을 힘들게 지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얼마나 힘이 남아있는지 죽기 전까지 이성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기 위해 여관에 들어오는 늙은 사람들의 한낮의 짧은 연정은 고단하게만 살아온 육십 대 후반의 나춘희 씨를 잠시나마 기쁘게 해 주었다.

나춘희 씨는 침대 시트를 벗겨내고 이불과 베갯잇을 돌돌 말아 밖으로 던지고 바닥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휴지나 다 먹은 음료수 병을 쓰레기통에 한데 모으고 화장대 위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를 빠른 속도로 정리하고 냉장고 안에 음료수를 채웠다. 바닥을 닦고 나면 새 침대 시트를 깔고 베개를 정리하고 새 수건을 올려둔다. 텔레비전과 에어컨, 선풍기의 먼지를 한번 걸레로 훔치고 나면 욕실로 들어가 쓰레기통을 비우고 휴지를 갈아 끼우고 바닥의 물기를 제거한다.

이 청소는 오래도록 반복하고 훈련한 데서 나온 듯 빠른 시간 내 이루어지지만 만약 손님들의 구토 흔적이나 깨진 술병과 여자들의 혈흔이 묻은 시트를 만나게 되면 일은 두 배로 늘어나게 되고 나춘희 씨의 욕설은 길어지기 일쑤였다.

“죽일 연놈들, 더럽게 연애하고 자빠졌네. 이런 인간들은 죽어서 지옥에 떨어져야 해. 쓰레기통에 휴지를 안 버리고 침대 밑에다 왜 뭉쳐 넣는지… 이놈의 연놈들이 산삼을 캐 먹었나, 도대체 몇 번이나 한 거야.”

나춘희 씨의 욕설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사장조차 나춘희 씨를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외면할 정도니 말이다. 마치 입 속에 도끼가 들어있는 듯 나춘희 씨는 욕설을 퍼부으며 휴지에 가래를 뱉는다.


나춘희 씨는 청소를 마치고 담배를 피운다. 그럴 때면 꼭 내 쪽으로 연기를 뿜어낸다. 주름지고 검고 윤기 없는 신산한 얼굴이지만 표정만은 씩씩하다. 오랜 노동에서 생긴 건장한 어깨와 팔, 그리고 두꺼운 손등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나춘희 씨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울 게 없는 표정으로 담배를 끝까지 깊이 빨아대고는 씨익 웃는다. 그 웃음은 어느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강인함에서 나오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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