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백설장 03화

백설장 3

- 가난한 연인

by 이도원

어느 해 겨울이었던가. 남녀 한 쌍이 들어와 밤새도록 빨래만 하고 나간 적이 있었다. 그들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욕실로 들어갔고 이내 물소리가 들렸다. 그 물소리는 밤새도록 이어졌다. 그들 연인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정확히 욕실에 들어간 지 네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물기가 남아있는 옷가지들을 모두 방바닥에 쭉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두꺼운 점퍼와 바지, 양말 등 갖가지 겨울옷들을 발 디딜 틈도 없이 쭉 깔아놓고는 침대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여자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젖가슴을 만지는 듯하더니 이내 여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들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머리를 베개 위에 올려놓고는 자신도 어느새 입을 벌린 채 잠들어 버렸다. 남자의 코 고는 소리와 여자의 낮고 얕은 숨소리는 오래도록 방안을 맴돌았다.

이튿날 새벽, 여자가 먼저 눈을 떴다. 여자는 허겁지겁 남자를 깨웠다.

“큰일 났어. 출근해야 돼. 늦었어.”

남자는 졸린 눈을 손으로 문지르며 커다란 여행 가방에 어젯밤 늘어놓은 옷가지들을 마구 구겨 넣었다. 여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옷이 아직 완전히 마르지 않았어. 그래도 다행이지 뭐야. 이렇게 빨래를 다했으니 말이야.”

남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빨래만 다하고 나가는 군”

여자는 남자의 말뜻을 알아차렸던지 슬며시 웃음 지었다.

“이 여관이 빨래하기 딱 좋아. 욕실이 넓고 수압도 세서 말이지. 무엇보다 별채니까 이렇게 물소리도 들킬 위험이 없고 말이야. 안 그래?”

남자는 여전히 뭔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고 여자는 그런 남자가 귀여운 듯 갑자기 남자의 한 쪽 뺨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왜 이래?”

남자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지만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여자가 재촉했다.

“이러다가 정말 늦겠어. 어서 나가야 해”

남자와 여자는 무겁게 보이는 가방을 서로 맞잡고 나갔다. 그들은 그렇게 가고 난 뒤 그 해 겨울 동안 몇 번 더 왔었다. 물론 그 해 겨울, 수도요금이 가장 많이 나온 것은 당연했다. 신여사는 장사장에게 잔소리를 들었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은 이전과 똑같이 들어오자마자 빨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간밤에 아무 일도 없이 잔 것에 대해 후회했고 그리고 서둘러 각자 자신의 일터로 가는 것이다. 그토록 알뜰했던 그들은 결혼을 했을까. 어쩌면 빨래를 실컷 할 수 있는 넓고 좋은 집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낯익은 부부가 들어온다.

“당신 오늘 왜 이렇게 술을 마신 거야?”

“오늘 월급날이어서 한 잔 했어.”

“아이고 냄새야. 얼른 들어가 씻어.”

여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욕실에 들어가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축 늘어져있는 남자의 옷을 벗기고 양말을 벗겼다. 남자의 남루한 옷은 흙먼지로 더러웠다.

“왜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다녀? 궁상맞게.”

여자는 화가 난 목소리로 남편을 일으켜 세운다.

“어서 들어가 씻어. 씻고 자.”

“귀찮아. 그냥 잔다.”

“안 돼. 그럼 옷에 술 냄새 밴단 말이야. 내일 출근은 어떻게 하라고.”

“내일 출근하지 마. 하루 느긋하게 여기서 쉬고 나가자.”

“안 돼. 이번 달엔 너무 많이 빠져서 눈치가 보여. 아이들 운동회다, 참관수업이다, 몇 번이나 빠졌단 말이야.”

“운동회를 했어? 그럼 달리기도 했겠네?”

“둘 다 2등 했어. 달리기는 아무래도 나를 닮았나 봐. 나도 1등 한 번 못해봤거든. 아빠랑 달리기 시합도 있었는데.”

“그래서 못 했어? 내가 없어서?”

“그렇지 뭐. 내년엔 당신이 꼭 가 줘.”

남자는 어두운 얼굴이 되었다. 남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가다가 욕실 문 앞에서 넘어질 뻔했다.

“조심해. 욕조 바닥이 미끄러워.”

여자는 남자의 옷을 옷걸이에 걸고 옷을 벗는다. 여자의 팔 위쪽에 불에 덴 자국이 넓게 번져있다. 여자는 가방에서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바르고 다시 옷을 입는다. 그리고는 전화를 건다.

“어머님, 저예요. 저녁은 드셨나요? 아이들은 뭐해요? 큰 애 좀 바꿔 주세요. 아들, 어 작은 아들이네? 형은? 게임한다고 바쁘다고? 나쁜 형이네. 너는 게임 안 시켜준다고? 알았어. 엄마가 가서 혼내줄게. 형과 사이좋게 놀아야지. 뭐? 아빤 잘 계시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아빠랑 만나는걸. 아하, 할머니가 그러셨구나. 그래. 아빠가 너희들 줄 선물 많이 사 갖고 오셨네. 내일 퇴근하고 가지고 갈게 … 이제 끊어야겠구나. 잘 자. 사랑해.”

여자는 전화를 끊고 텔레비전을 켠다. 가족이 모여 밥을 먹고 있는 드라마를 보는 여자의 표정은 착잡하게 바뀐다. 그 때 남자가 욕실에서 나온다.

“왜 수건으로 몸 좀 닦고 나오지. 여기 이 바닥에 물 좀 봐.”

남자는 여자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눕는다.

“침대가 젖잖아. 왜 그래? 어서 닦고 자.”

여자가 짜증을 내며 말한다.

“당신 잔소리는 여전하군 그래. 이렇게 한 달에 한 번 만나도 말이지.”

“당신은 뭐 다른 줄 알아? 이젠 정말 지겨워져.”

여자는 욕실로 들어간다. 남자는 잠에 빠지려는 듯 눈을 감고 있지만 그게 여의치가 않았을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고 잠이 다 달아났네. 그놈의 잔소리 때문에.”

남자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화면에 집중한다. 여자는 이내 욕실에서 나온다. 긴소매 옷을 입은 채 화장대 앞에서 얼굴을 닦는 여자의 얼굴을 남자가 곁눈질한다.

“샤워는 안 하는 거야? ”

“왜? 땀 냄새 나?”

“그럼 안 나? 하루 종일 공장에서 일했을 거면서.”

“그래도 안 씻을 거야. 아니 못 씻어.”

“왜 그래?”

“됐어. 당신은 침대에서 자. 나는 아래서 잘 테니까.”

“맘대로 해.”

남자는 화가 난 듯 거칠게 침대 위의 이불을 펼쳐 몸을 덮는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못마땅한 듯 바라본다.

“아이들은 걱정도 안 돼? 이젠 묻지도 않네.”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여자는 침대 옆 모서리에 등을 갖다 대고 기댄다.

“이젠 여기 주인이 우릴 아는 눈치 같아. 서비스로 맥주를 주는 걸 보면 말이야. 우리가 지난 몇 년간 이렇게 왔으니 단골로 생각할 게 틀림없지. 어쩌면 우리가 많이 지쳐 보여서 그런 걸 거야. 연인들은 다르겠지? 여관으로 들어올 때 말이야. 분위기가 다를 거야. 당신 맥주 한 잔 할래?”

남자는 아무 말이 없다. 여자는 맥주를 병따개로 따서 한 잔 쭉 들이켠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셔츠를 벗어 팔의 상처를 살핀다.

“큰일 났네.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지? 에라 모르겠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뭐.”

여자는 혼잣말을 하며 두 잔 째 들이킨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어쩌다가 팔을 다친 거야? 칠칠치 못하게 … 그래서 샤워를 안 했던 거군.”

“한 눈만 팔면 꼭 이래. 오늘밤 당신과 만난다고 생각하니 설레어서 그랬던 모양이지 뭐 알고 보면 당신 책임이야. 이게 모두.”

“참내 모든 건 내 책임이군 그래. 오늘따라 이 여편네가 잠을 못 자게 하네.”

남자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여자 쪽으로 다가온다. 여자는 남자에게 맥주를 가득 채워준다. 남자가 그것을 시원하게 들이켠다.

“당신은 나와 한 달 만에 겨우 만나는 건데도 잠이 와? 나는 잠이 안 와. 내일 아침 출근해야 하는데도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여관을 전전한 게 벌써 몇 년이나 지났는데 그런 감정이 남아있다는 거야?”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지만 정작 남자의 표정엔 싫지 않은 듯 옅은 미소가 깔려있다. 여자는 벌써 세 잔 째 마시고 있다.

“오늘은 술이 잘 들어가네. 술술 말이야.”

“됐어. 그만해. 그러다가 정말 상처가 덧나면 어쩌려고 그래?”

“덧나라고 그래. 팔이 덧나면 팔을 자르면 되고 다리가 덧나면 다리를 자르면 되고 자궁이 덧나면 자궁을 들어내면 되고 젖가슴이 덧나면 젖가슴을 도려내면 되고 심장이 덧나면 심장을 끄집어내면 되고. 당신… 모르지? 나 가끔 죽고 싶을 때가 있어. 지하철 앞에 서 있으면 선로가 보여. 그것을 안 보려고 얼마나 애쓰는지 몰라. 나는 선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쪽에 서 있어. 괜히 음료자판기 앞에서 얼쩡대는 거지. 뛰어들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느라 … 당신은잘 살고 있지? 잘 버티고 있는 거지?”

“엉망이군 그래.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러니까 당신만이라도 제대로 살아보라고 하는 거잖아. 당신은 좋은 남자고,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성실하고 그리고 섹스를 잘하지.”

“듣기 싫은 말은 아니군.”

“거짓말 아니야. 난 아직도 당신이 나에게 키스를 해주는 게 좋고 안아주는 게 좋고 사랑을 나누는 게 좋아. 이렇게 가난한데도 말이지. 가난해서 고작 이런 여관에서만 만날 수 있는데 말이지.”

남자는 술에 취해 마구 떠들어대는 여자를 안는다.

“이제 자. 내일 새벽에 깨워줄게.”

“싫어. 안 자. 사랑을 나누고 자야지. 나 ... 그동안 얼마나 당신이 보고 싶었는데… 오늘밤은 우리 뜨겁게 사랑을 나눠야지.”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 지금 얼마나 취했는지 알기나 해?”

남자는 여자를 안아 침대 위에 눕힌다. 그리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맥주병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창문 앞으로 다가간다. 문을 열고는 담배를 피워 문다.

“당신은… 당신은 말이지… 정말 착한 남자야. 착해서 이렇게 마누라를 힘들게 하지.”

여자는 이 말을 하고는 바로 잠들어버린다. 남자는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본다.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keyword
이전 02화백설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