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 민지는 조금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다. 마음이 조금 힘들어도 그게 몸으로 반영이 되어 나타났다.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배가 아프다고 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었다고 내게 말하지 않았지만 아이를 살펴보고 난 후에 알게 되었다. 아이는 혼자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내게 말하지 않았겠지만, 심적으론 내내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듯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어렸을 적에 학교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한달음에 달려가 배가 아프다고 배를 쓸어달라고 얘기했었다. 가만히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엄마의 손 마사지를 받고 있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져 금방 배 아픈 게 나았다. 엄마는 내게 무슨 병이 있나 싶어 걱정스러워하시며 한의원에 데려가 약을 지어 먹이시기도 했다. 지금 민지가 그렇다. 소아청소년과에 데려가 기본 검사를 했지만, 복통에 대한 뚜렷한 병명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나에게 배가 아프다고 자주 얘기했고 나는 아이를 뉘어 놓고 가만히 배를 쓸어주었다. 5분이고 10분이고 가만히 아이의 배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가 배 쓸어주니까 좋아.'라고 말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아이의 원인 모를 복통은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신호였다. 아이가 셋이다 보니 한 명, 한 명 살뜰히 챙길 수가 없었다. 첫째는 첫째라서, 막내는 막내라서 나의 손길이 더욱 필요했다. 하지만 가운데 낀 민지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잘 못 썼다. 아이는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세요.'라는 신호를 그렇게 보낸 것이었다. 아이가 내게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잘 알아차리지 못하니 아이도 나의 관심을 받기 위해 나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점차 늘어났다. 아이의 요구사항을 하나둘 들어주다 보면 아이 몸의 이상 신호는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마음의 안정을 얻음으로 몸의 이상도 해결이 되는 듯하다. 그래서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런 아이의 신호는 평소 애착 관계를 잘 형성한 엄마만이 알아챌 수 있다. 함께 아이를 양육하는 아빠도 그냥 무심히 넘겨버리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남편에게 얘기하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니 말이다.
요즘 들어 둘째는 소리를 많이 지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저러나 싶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내 모습이 민지 안에 내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한동안 소리를 많이 질렀다. 옆집에 미친년이 산다고 할 정도로 소리를 질러 내 목소리가 우리 집 밖까지 새 나갔다.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아이들이 내 말을 들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그때뿐이었고 아이들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엄마가 또 시작이구나.'라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날 쳐다봤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는 나를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당시 접한 책이 <화내는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라는 책이었다. 나를 향하는 비난 같아서 반성하면서도 소리 지르기를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재한 화를 어떻게 해소할 수 없어서 소리 지르는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그 대상이 힘없는 아이들이었으니 지금 되돌아보면 내가 정말 미쳤었던 것 같다. 당시 나의 스트레스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남편이었다. 남편의 사업이 기울어서 생활비가 부족했다. 아이가 셋이라서 점점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오히려 남편의 수입은 줄어서 많은 부담을 느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셋에 육아는 힘들고 경제적인 상황까지 좋지 않으니 그 압박감에 미칠 것만 같았다. 남편은 내게 맞벌이를 권유했고 나는 그게 너무도 싫었다. 아이 셋을 키우는 것도 힘든데 나가서 돈까지 벌어오라니 뭔가 싶었다. 남편도 많이 힘들어서 맞벌이를 원한 것이었을 텐데 나는 옹졸한 마음에 남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원망만 했다. 사실 남편은 육아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살림도 잘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서 살림도 육아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맞벌이해도 그것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그때 죽음을 다시 생각했다. 왜 나의 삶은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만을 바라보는 아이들 셋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엄마 없이 자랐다. 그것은 정말 고된 일이었다. 그 고됨을 알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엄마 없는 설움을 겪게 하기 싫었다. 돌아가신 엄마를 원망했다. 나를 두고 왜 돌아가셨는지. 나를 책임도 지지 못할 거면서 왜 낳았는지 원망에 원망을 거듭했다. 사춘기 시절에 동네 약국을 돌아다니며 수면제를 사서 모은 적이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만 싶었다. 그래서 잠이 안 온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샀다. 약사는 수면제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되니 운동이나 다른 거로 잠을 유도하라면서 몇 알의 수면제를 줬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약국이 보이면 같은 레퍼토리로 수면제를 샀다. 그리고 집에 두면 들킬까 봐 항상 가방 한쪽에 수면제를 꼭꼭 감췄다.
한창 꿈을 꿀 나이에 죽고만 싶었다. 잘한다고 칭찬해줄 엄마도 없었고 힘들다고 안아줄 엄마도 없었다. 엄마를 따라 죽으면 나의 힘듦이 끝나고 모든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을 기댈 대상 없이 부표 잃은 배처럼 방황했다. 30알가량의 수면제를 모은 후 어디서 죽을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어디서 먹어야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마감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면제를 먹기 전에 누가 나를 말려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누군가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안아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나는 엄마를 잃고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을 드러낸다고 알아봐 줄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될 집안 분위기에 나는 그저 조용한 아이가 되어갔다. 존재감 없는 아이. 그게 내가 살아갈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버려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제를 일으키면 외삼촌이 나를 보육원에 보낼 거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사춘기의 나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서른 알의 수면제를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친한 친구를 만난 후였다. 나와 생각이 맞고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친구를 만났다. 중학교 2학년 올라가던 해였다. 처음으로 짝꿍이 된 아이였는데 그 아이와 나는 마음이 잘 통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비슷했다. 어쩜 이리 마음이 맞을 수가 있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그래서 학교에 가면 그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았고 하교할 때는 헤어지기 아쉬워 서로의 집까지 데려다 주기도 했다. 심지어 전화를 몇 시간씩 붙들고 있기도 했다. 그 아이를 만난 후 나는 가방 안의 수면제에 대해 까맣게 잊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 아이를 만난 건 천운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 내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우리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사춘기에 들어선 민지에게 필요한 건 나처럼 마음을 기댈 누군가가 아닐까 싶다. 민지의 힘듦을 이해하고 온전히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 말이다. 내가 엄마여서 정말 다행이다 싶은 순간이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내 아이에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아이의 배를 쓸어주며, 아이를 안아주며,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며 내가 살아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낀다. 그때 수면제를 먹었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이 없을 테니 말이다.
요즘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눈 맞추기도 실천하는 중이다. 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아이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아이의 마음을 알아내고 다독여준다.
요즘 민지는 불쑥불쑥 화가 난단다. 왜 그러냐고 가만히 물으니 동생이 자신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만지고 함부로 한단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너무 안 들어서 힘들다고 한다. 나는 그 말에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한빛이는 남자아이라서 우리 여자와는 다르다고 얘기해 줬다. 그래서 때론 엄마도 힘들다고. 엄마도 힘든데 누나인 네가 힘든 건 당연한 거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관해 얘기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니 민지는 수긍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물건을 한빛이가 만지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여 그럴 때는 소리를 지르지 말고 의견을 잘 말해보라고 얘기했다. 가만히 생각하더니 알았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한빛이에게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줄 것도 내게 요구했다. 물론 민지의 행동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지만 참 기특한 게 스스로 노력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할 때 내게 도움을 구했다. 나는 이럴 때 내가 엄마인 게 다행으로 느껴진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고 도움을 주고 바른길로 이끌 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사춘기 시절 수면제를 먹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보석 같은 세 아이를 만났으니 말이다. 세 아이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 것인가를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다.